제도가 닿지 않는 곳, 공익법인이 먼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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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의 손이 미처 닿지 못하는 자리는 늘 생긴다. 이주배경 주민이 늘고 기후위기가 깊어지는 등 풀어야 할 문제는 많아지고, 기술이 발전하면서 해결 방법도 달라지고 있다. 하지만 제도와 정책이 이런 변화를 제때 따라잡기는 쉽지 않다. 정부·지방자치단체 지원사업은 정해진 대상과 기준을 따르고, 기업 사회공헌도 대개 한 해 계획을 미리 설계한다. 그래서 이제 막 활동을 시작한 작은 단체나 아직 검증되지 않은 시도는 지원받기 어렵다.
공익법인은 이 틈에서 먼저 돈과 사람을 지원하고, 다양한 실험을 응원해 그 시도가 공공 정책이나 다른 영역으로 퍼져 자리 잡도록 돕는다. 공익법인이라 하면 대기업 장학재단이나 자선단체를 떠올리기 쉽지만 실제 범위는 훨씬 넓다. 학교, 병원, 복지시설을 운영하는 법인부터 기업이 세운 재단, 시민의 기부로 꾸리는 단체까지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 풀뿌리희망재단과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역시 사회적 문제를 발견하고 새로운 해법을 찾아가는 공익법인의 가치를 현장에서 실천하는 곳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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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들이 모은 돈으로 ‘없던 조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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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재단’은 지역주민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세운 공익법인이다. 국내 첫 지역재단으로 꼽히는 풀뿌리희망재단은 2005년 막사이사이상을 받은 천안의 시민운동가 윤혜란씨가 상금 5만달러를 내놓으며 첫발을 뗐다. 시민 233명이 힘을 보태 약 3억5000만원을 모아 이듬해 재단을 세웠다.
재단은 결식아동 급식비나 대학 새내기 첫 등록금처럼 당장 급한 곳도 도왔지만, 공을 들인 건 지역에 필요한 단체를 세우고 자리 잡을 때까지 돈과 사람을 지원하는 ‘인큐베이팅’ 작업이었다. 새 조직에는 3년간 최소 1억원씩, 지금까지 7곳에 8억8700만원을 지원했다. 지역 단체 43곳에도 활동가 인건비와 사업비를 보탰다. 이런 시도가 가능한 이유는 돈을 쓰는 방식이 유연해서다. 지난 10월21일 충남 천안에서 만난 임재은 풀뿌리희망재단 사무국장은 “재단에는 무언가 시도해 볼 수 있도록 씨앗을 줄 자율성이 있다”고 말했다. 재단은 그해 쓰지 않은 사업비로 하반기에 시범사업을 만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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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이 마주한 문제가 바뀌면서 재단이 메우는 빈틈도 달라지고 있다. 충남은 지난해 기준 외국인 주민 비율이 7.9%로, 전국 광역자치단체 중 가장 높았다. 이주배경 가정에선 언어와 문화, 경제적 차이와 돌봄 문제가 한데 겹친다는 게 임 사무국장의 설명이다. 이런 변화에 맞춰 아동·청소년에 집중됐던 인큐베이팅도 최근 이주배경청소년센터 ‘다빛’을 비롯해 기후위기 대응 단체 ‘기후행동 나우(NOW)’, 간호사와 약사 등 자원활동가가 혼자 사는 이웃을 찾아가는 ‘우리동네보건실 하루’로 넓어졌다.
자금 지원만큼 문제를 해결할 사람을 찾는 것도 재단의 몫이다. 임 사무국장은 “지역에 사람이 세워져야 활동이 꾸준히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물론 모든 시도가 결실을 보는 것은 아니다. 재단은 네 번째 인큐베이팅 대상으로 홀로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의 자조모임을 선정했다. 재단 구성원들은 사회적협동조합이나 사단법인 설립을 고민했지만, 생계와 육아를 병행하면서 조직 운영까지 맡을 사람을 찾지 못했다. 결국 2년 만에 단체 설립을 접었다. 임 사무국장은 “그런 실패도 필요하다”며 “조직을 만든다는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사람을 지원하는 활동으로 보면 이게 꼭 실패일까”라고 되물었다. 성과 목표부터 따지는 지원사업이었다면 실패로만 기록됐을 일이다.
지역 곳곳에 공익의 가치를 뿌리고 있지만, 이런 시도를 떠받치는 살림은 넉넉하지 않다. 재단은 20년간 정부·지자체 지원 없이 시민 기부로 운영해 왔다. 이는 지원 조건에 얽매이지 않는 자율성의 바탕이지만 해마다 모금해야 살림이 돌아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가진 재산에 기댈 수도 없다. 법인의 밑천인 기본재산을 처분하거나 용도를 바꾸려면 주무관청의 허가를 받아야 하고, 그 이자만으로는 사무국 운영비를 충당하기도 어렵다.
단체를 만들고 활동가를 키우는 일이 기부자의 공감을 얻기도 쉽지 않다. 당장 필요한 생계비를 지원하거나 무료급식 봉사를 하는 것과 달리 성과가 곧바로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임 사무국장은 재단이 하는 일을 “지역에 없지만 꼭 필요한 단체와 기관을 만들어내는 데 자원도 만들고 사람도 붙이고 연결하고 모금도 한다”고 설명했다. 재단을 소개할 이 말을 찾기까지 18년이 걸린 것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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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번 쓰는 기부금, 다시 쓰는 투자로
전국 단위의 큰 공익법인도 사회 문제의 해결을 위해 기부를 넘어 새로운 방식을 찾고 있다. 1948년부터 아동복지 사업을 해 온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초록우산)은 지난 9월 임팩트 비즈니스 전문기업 임팩트스퀘어, 비영리 사단법인 루트임팩트와 ‘아동임팩트기금’(가칭) 조성을 위한 업무협약을 맺었다. 아동 문제를 해결하는 소셜벤처(혁신적인 기술이나 사업 방식으로 사회문제를 풀면서 수익도 내는 기업) 등에 투자하고, 회수한 돈은 다시 아동을 위한 공익사업에 쓰는 방식이다. 기금은 약 30억원 규모를 목표로 내년 상반기 결성할 계획이며, 투자 대상은 이후 심사를 거쳐 확정한다. 후원금으로 아이들을 직접 지원해 온 단체가 투자에 나선 이유는 무엇일까? 신란지 초록우산 경영전략팀장은 “후원금으로 아이들을 직접 돕는 일은 앞으로도 초록우산의 중심”이라며 “다만 한정된 후원금을 한 번 쓰고 끝내는 방식만으로는 문제의 구조를 바꾸거나 해법을 오래 지속시키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주배경 아동의 언어 문제나 디지털 환경 속 청소년 정신건강처럼 해결해야 할 문제가 복잡해지면서 새로운 기술과 서비스의 필요성도 커졌다. 아이를 한 명씩 지원하기보다 이를 해결하는 서비스 하나가 안정적으로 자리 잡으면 더 많은 아동에게 꾸준히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김예지 초록우산 임팩트허브팀장은 이주배경 아동을 예로 들었다. 김 팀장은 “지원금은 사업이 끝나면 멈추지만 이주배경 아동을 위한 학습 서비스를 만드는 기업이 자리를 잡으면 그 도움이 계속 이어진다”며 “직접 지원과 투자를 함께 쓰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초록우산이 새로운 시도를 위한 길을 여는 데만 1년 반이 걸렸다. 공익법인은 정관에 정한 목적사업에만 돈을 쓸 수 있는데 사회복지법인의 투자를 목적사업으로 볼 수 있는지 명확한 규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초록우산은 보건복지부에 유권해석을 받고 감독 기관(주무관청)인 서울시와 협의한 끝에 지난 8월 정관 변경 인가를 받았다. 초록우산에 따르면, 확인된 범위에서 정관상 목적사업으로 인가받은 곳은 국내 사회복지법인 가운데 처음이다. 신 팀장은 “단체마다 개별적으로 해석과 인가를 받아야 하는 부담을 덜 수 있도록 사회복지법인의 공익목적투자를 법령에 명확히 규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공익사업을 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았지만 이를 실제로 실행하기까지는 넘어야 할 문턱이 많다. 세법상 불확실성도 남아 있다. 공익법인은 기부받은 재산을 공익목적사업에 쓰지 않으면 증여세를 내야 한다. 투자가 여기에 해당하는지는 세법에도 규정이 없다. 이에 공익목적투자를 공익목적사업으로 명확히 인정하는 상속세 및 증여세법 개정안이 2025년 1월 국회에 발의됐지만 아직 소관 상임위원회에 머물러 있다.
■ 406조원 공익자산, 쓰는 길은 좁고 감독은 흩어져
국세청이 지난 5월 처음 펴낸 ‘공익법인 연차보고서’를 보면, 지난해 결산서류를 공시한 공익법인 2만1318곳이 가진 자산은 406조원이다. 하지만 학교나 병원 건물처럼 사업에 묶인 부동산이 적지 않다. 한 해 사업수익 202조원 가운데 기부금은 5%(11조원)에 그친다. 대부분은 학교등록금이나 복지시설 이용료처럼 사업의 대가로 받는 수입(40%)과 정부 보조금(31%)이다.
공익법인이 성장하고 제 기능을 다하려면 공익자산을 더 넓게 쓰고 더 많이 모을 수 있게 길을 열어주자는 목소리가 나온다. 초록우산처럼 공익목적투자를 가능하게 하고, 선한 의지를 가진 이들의 주식 기부를 높이기 위한 세제 혜택 도입도 검토해보자는 것이다. 다만 주식 기부를 두고 신중론도 있다. 대기업 공익법인이 계열사 주식을 보유하고 의결권을 행사해 총수 일가의 지배력을 우회적으로 강화·유지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우려를 차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공익자산을 사회문제 해결에 더 적극적으로 활용할 길을 여는 동시에 사적 지배를 막고 자산의 쓰임새를 투명하게 관리할 장치가 함께 필요하다. 그런데 이를 맡을 관리 체계도 흩어져 있다. 주무관청은 법인의 사업에 따라 보건복지부, 교육부와 지방자치단체 등으로 나뉜다. 초록우산이 1년 반 동안 법 해석을 구하고 주무관청과 합의해야 했던 것도 공통의 기준이 없어서다. 지원과 감독을 한 곳에서 맡을 공익위원회를 만들어 공익법인 활성화를 추진하자는 법안도 지난해 12월 발의돼 국회에 묶여 있다. 이희숙 재단법인 동천 상임변호사는 “관리·감독이 여러 부처에 흩어져 판단 기준도 제각각”이라며 “공익법인을 전문적으로 관리할 공익위원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신효진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연구원 jinnytr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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