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 책 번역한 35년차 번역가는 왜 도쿄에서 매일 길을 잃었을까 [장주영 기자의 여책저책]

오래 해 온 일의 장점은 익숙함입니다. 그 익숙함을 바탕으로 능숙함까지 이어지면 금상첨화겠죠. 여행을 떠날 때도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여러 번 다녀 온 곳이나 지금 사는 곳 또는 좋아하는 곳과 인연이 있다면 어색하지 않게 잘 즐길 수 있죠.
하지만 태어나 처음 가는 곳이나 정보마저 별로 없을 정도라면 긴장감이 올라갑니다. 때로는 불안하기도 하고, 실수를 연발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런 서툰 걸음과 도전 하나 하나가 모여 결국 제자리를 찾아갈 겁니다.
권남희 저자의 책 ‘안식월 일기’는 35년 차 일본문학 번역가가 도쿄에서 한 달을 살며, 길치로 매일 헤매면서도 여행도 번역도 길을 찾고 잃고 다시 만드는 일이라는 깨달음에 닿습니다.
저자는 완벽한 준비 대신 일단 떠나는 용기가 삶의 다음 장을 연다는 응원을 보냅니다. 또한 길을 잃고 헤매는 과정이 곧 일과 삶을 다시 세우는 시간이라고도 전합니다.
안식월 일기
권남희 ㅣ 다산책방
‘아, 여기서 이렇게 갔어야 했구나. 여기서 엄청나게 돌았구나.’ 여행 중 한번쯤 겪어봤을 한탄(?)이다. 노트북을 켜고 화면에 구글맵을 띄워 하나하나를 짚다 보면 머릿속으로 영상 여럿이 지나간다. 마치 경기를 복기하는 운동선수처럼 말이다. 책 ‘안식월 일기’의 저자 권남희는 일본 도쿄에서의 한 달 살이를 대개 이런 식으로 보냈다.
그래서일까. 책은 여행에세이로 분류할 수 있지만 좀 더 세세하게 말하자면 일본문학 번역가 권남희의 도쿄 한 달 살이 기록이란 점에 더 가깝다. 저자는 지난 35년 동안 무라카미 하루키, 마스다 미리, 오가와 이토 등의 작품을 우리말로 옮겨 왔다.
그의 이름이 실린 책만 무려 300권 넘는다. 언뜻 이 정도로 일본 문화에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는 만큼 도쿄쯤은 식은 죽 먹듯 수월할 것 같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타고난 길치에 혼자 밥 먹기는 여전히 큰일인 내향인 성향의 저자라서다. 그런 저자가 생애 첫 안식월을 맞아 십 년 묵은 버킷 리스트를 꺼냈다.
계기는 메일 한 통이었다. 책 ‘츠바키 문구점’의 작가 오가와 이토가 보내온 편지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세상이니, 하고 싶은 일은 미루지 않고 지금 하라는 마음이 적혀 있었다. 그사이 저자는 부모님을 차례로 떠나보냈고, 홀로 키운 딸은 어엿한 어른이 됐다.
오래 함께한 반려견마저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적막해진 집에서 그는 마음을 정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가야할까 고민하던 중 디데이를 벚꽃 개화일로 잡았다. 그렇게 저자는 도쿄행 한 달 살이 길에 올랐다.
도쿄에서의 하루는 늘 우당탕퉁탕이다. 하루 2만2000보를 걸으면 삼분의 일은 헤매느라 걸은 걸음이다. 목적지를 코앞에 두고도 길을 묻고, 초행도 아닌 길에서 만난 할아버지는 뒤에서 ‘인간 내비게이션’이 돼 줬다.
저자는 이 모든 소동을 담담하고 유쾌하게 털어놓는다. 그러다 가마쿠라에서 여행도 번역도 길을 찾고, 길을 잃고, 다시 길을 만드는 일이라는 것을 문득 깨닫는다. 번역 30여 년 차에 얻은 뒤늦은 깨달음이다.
번역가에게 도쿄는 글로 옮긴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도시다. ‘츠바키 연애편지’를 들고 소설 속 동네를 헤매고, 마스다 미리가 추천한 디저트 가게를 순례한다. 디저트를 즐기지 않던 사람이 단고(경단)에 빠지고, 품위 있는 팬케이크 앞에서 감탄한다.
자신의 책이 놓인 서점을 찾아가고, 편집자를 만나고, 일본 독자들 앞에서 북토크도 연다. 데뷔작부터 번역해 온 오가와 이토의 집에 초대받고, 일본 최대 출판사 쇼가쿠칸 회장의 환대까지 받는 하루는 일본 드라마의 한 장면 같다. 오래 좋아하고 오래 일한 시간이 뜻밖의 선물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진보초 고서점가의 밤 풍경을 본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몇십 년을 드나들었지만 언제나 해가 지기 전에 돌아가는 여행자였기 때문이다. 셔터가 내려진 고요한 골목을 걷다 문득 행복해지는 순간, 한 달 살이만이 건넬 수 있는 선물이다.
책의 동선을 따라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월 단위로 빌리는 아파트인 먼슬리 멘션에 짐을 풀고, 도쿄의 첫 아침을 맞고, 살림살이를 하나씩 장만했다. 혼밥은 여전히 큰일이어서 야키니쿠 집에서 홀로 고기를 굽는 날은 작은 모험처럼 발걸음을 옮겼다.
일본에서 가장 큰 벼룩시장을 구경하고, 당일치기로 아타미에 다녀오고, 도쿄대에서는 한참 물을 멍하니 바라보는 물멍을 했다. 낯선 곳에서 지진을 겪은 날도 있었고, 한국어가 들려와 깜짝 놀란 날도 있었다. 모든 장면이 거창한 관광이 아니라 ‘살아 보는 여행’의 조각인 셈이었다.
여행에는 ‘이 나이’가 돼서야 느끼는 감정이 따라붙는다. 좋은 곳에서는 문득 돌아가신 엄마 생각에 울컥하고,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니느냐는 딸의 안부에 또 한 번 울컥한다. 20대에 만나 30년 넘게 우정을 쌓은 일본 친구들과의 대화 주제는 어느새 부모 돌봄과 치매가 됐다. 스무 살의 여행이 설렘으로 가득하다면 이 나이의 여행은 아쉬움과 후회, 애틋함과 감사함으로 빼곡하다. 도쿄를 찾아온 딸과 함께 보내는 시간도 그래서 더 애틋하다.
그렇다고 책이 눅눅해지는 법은 없다. 우울이 곰팡이처럼 번지던 날, 모처럼 쇼핑을 하고 돌아오니 우울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저자는 우울증은 수용성이라 샤워하면 좋아진다는데, 아무래도 금(金)용성인 것 같다고 결론 내린다. 아울러 돈을 써야 좋아지고, 게으름은 불치병이고, 젊음의 문제가 아니라 성향의 문제라고 저자는 고백한다.
여정의 후반부에는 딸 정하가 도쿄로 날아온다. 연휴에 연차를 붙여 온 딸은 아침에 헤어지고 저녁에 만나도 반가운 자식이지만 오랜만이라 더 반갑다. 하코네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엄마가 아픈 날 빡빡한 일정을 짠 것이 속상해 말수가 줄어든 딸의 표정도 담겼다. 사랑은 이렇게 말없이도 전해진다.
추천사를 쓴 작가 김민철은 이 정도면 ‘안식월’이 아니라 ‘고생월’로 고쳐야 하지 않느냐고 농담을 던진다. 틀린 말은 아니다. 길 위에서는 매번 길을 잃지만, 오래 해 온 일의 시간만큼은 정확히 제자리를 찾아 인연으로 돌아온다. 완벽하지 않아도, 조금 늦어도, 길을 좀 잃어버려도 결국 각자의 안식월에 도착할 수 있다는 응원이 책 곳곳에 깔려 있다.
이 책은 여행 가이드로 읽히기보다 하나의 질문으로 남는다. 당신의 ‘언젠가’는 언제인가. 도쿄 골목 어딘가에서 지도를 들고 서성이는 환갑 즈음의 번역가를 떠올리면 미뤄 둔 계획에도 슬며시 용기가 생긴다. 완벽한 준비도, 넉넉한 시간도 필요 없다. 필요한 건 벚꽃 개화일 같은 디데이 하나 그리고 일단 비행기표를 끊는 배짱이다.
※ ‘여책저책’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세상의 모든 ‘여행 책’을 한데 모아 소개하자는 원대한 포부를 지니고 있습니다. 전문적인 출판사도 좋고, 개별 여행자의 책도 환영합니다. 여행 가이드북부터 여행 에세이나 포토북까지 어느 주제도 상관없습니다. 여행을 주제로 한 책을 알리고 싶다면 ‘여책저책’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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