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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October 31, 2026

“기억이 뒤엉켜도 ‘핵심 장면’은 안 변한다”…5·18 조사관이 법정에서 밝힌 ‘진실의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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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29일 광주광역시 국가폭력트라우마치유센터에서 열린 5·18 성폭력 피해 증언자 첫번째 모임에서 서지현 전 검사와 피해자가 손을 맞잡고 있다. 정효진 기자

2024년 8월 29일 광주광역시 국가폭력트라우마치유센터에서 열린 5·18 성폭력 피해 증언자 첫번째 모임에서 서지현 전 검사와 피해자가 손을 맞잡고 있다. 정효진 기자

“군용 트럭 바퀴가 몇개인지는 기억하지 못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피해 사실의 핵심 진술이 생생하고 5·18 당시 군 작전 상황과 기억이 일치한다면 진술을 인정할 수 있다고 봤습니다.”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 등에 의한 성폭력 피해를 조사했던 윤경회 전 조사팀장이 30일 법정에서 밝힌 ‘과거 국가 성폭력 진상규명 기준’이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2부(재판장 박정호)는 이날 5·18 성폭력 피해자 김복희씨 등 17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 윤 전 팀장을 증인으로 불러 신문했다. 윤 전 팀장은 2023년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 조사위원회(조사위)에서 과거 일부 계엄군 등이 자행한 강제추행·강간·성고문 등 피해 사건들을 직접 조사하고, 보고서 작성 등에 참여했다.

그는 조사 당시 피해자들의 진술을 확보하는 과정부터 쉽지 않았다고 했다. 조사위는 성폭력 피해 의심 사례 52건을 파악했지만, 실제 조사에 동의한 피해자는 19명에 불과했다. 피해자들은 수십년간 가족에게조차 피해 사실을 털어놓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조사 도중 구토하거나 울음을 터뜨렸고, 사건 발생 날짜와 장소를 정확히 기억하지도 못했다. 윤 전 팀장은 “1980년 당시 10대였던 여성들이 40여년 만에 처음 국가 공무원 앞에서 피해사실을 말하는 것이었다. 한번도 누구에게 말해보지 않았으니 진술이 하나의 이야기로 정리되지 않았다”고 했다.

이처럼 가장 기본적인 진술이 흔들릴 때, 조사위가 주목한 것은 피해자의 몸에 남아 있는 ‘감각 기억’이었다. 성폭력 직후 하혈하던 느낌, 몸에 닿았던 체액의 차가운 느낌처럼 오랜 시간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기억들이다. 윤 전 팀장은 “진술의 일관성과 구체성이 떨어져도 남아 있는 것이 감각 기억이었다”며 “죽을 것 같은 공포 속에서 겪은 일이, 언어화되기 전에 몸에 저장돼 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5·18 계엄군과 경찰이 자행한 성폭력 피해 증언자 모임 ‘열매’가 지난해 11월7일 서울 서초구 중앙지법 앞에서 첫 재판 관련 기자회견을 마친 후 피해자를 위한 진실과 치유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성폭력 피해자 및 가족 17인은 이날 법원에서 45년 만에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의 첫 재판에 참석했다. 한수빈 기자

5·18 계엄군과 경찰이 자행한 성폭력 피해 증언자 모임 ‘열매’가 지난해 11월7일 서울 서초구 중앙지법 앞에서 첫 재판 관련 기자회견을 마친 후 피해자를 위한 진실과 치유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성폭력 피해자 및 가족 17인은 이날 법원에서 45년 만에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의 첫 재판에 참석했다. 한수빈 기자

피해자의 말을 무조건 사실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조사위는 피해자가 기억하는 핵심 장면을 당시 계엄군의 작전 기록, 부대 이동 경로, 항공 사진, 참고인 진술 들과 대조했다. 계엄군 32명을 직접 조사하고 유사한 피해 사례를 확인하기도 했다. 피해자 진술에 부합하는 증거와 배척하는 자료를 동시에 살펴 어느 쪽이 우세한지 판단했다. 이런 내용은 경향신문이 2024년 5월 ‘우리는 서로의 증언자’ 기획에서 조명한 내용이기도 하다.

조사위는 2023년 12월 성폭력 피해 16건에 대해 ‘진상규명’ 결정을 내렸다. 국가기관이 과거사 성폭력 사건을 정식 조사 대상으로 삼아 종합 피해 실상을 규명한 첫 사례였다. 이에 피해 당사자와 유족들이 이듬해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냈는데, 2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11월에야 열린 첫 변론에서 국가 측은 불법행위가 발생한 1980년대부터 소멸시효가 진행돼 배상청구권이 소멸됐다고 주장했다. 반면 원고 측은 2023년 말 진상규명 결정 이후 소송을 제기했으며, 기존 보상금 역시 성폭력 피해에 대한 보상은 아니라고 반박했다.

이날 재판부도 행정기관의 진상규명 절차와 법원 재판은 성격이 다르다고 짚으며, 법원이 피해 사실을 입증하는 과정에서 특별히 고려해야 할 점이 무엇인지 증인에게 물었다. 이에 윤 전 팀장은 “국가폭력 피해가 발생한 지 수십년이 지난 사건에 기존의 진술 판단 기준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며 “피해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조리있게 표현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받아서는 안되고, 조사위에 나타난 객관적 자료를 바탕으로 판단해달라”고 했다. 최근 성폭력 피해의 특성을 반영한 보상 기준과 전문적인 조사·심의 절차를 마련하는 시행령 개정도 추진 중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판결문은 당사자가 자신의 삶을 설명할 수 있는 근거다. 그동안 피해자들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하고 부끄러워했던 일을, 국가가 드디어 짊어질 수 있도록 해달라”며 “너무나 오래 기다린 시간의 무게를 법원이 인정하고 피해자들을 위로하는 판결이 나오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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