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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October 5, 2026

콘텐츠산업을 바꾼 순간…‘칸’의 발명과 함께 시작된 스토리텔링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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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제네바의 학교 교사 로돌프 퇴퍼가 1837년에 낸 ‘비외 부아 씨 이야기’는 한 면에 한 개에서 여섯 개의 칸을 배치하고 그 아래에 짧은 글을 붙인 형태였다. ‘비외 부아 씨 이야기’의 한 컷. 위키미디어코먼스
스위스 제네바의 학교 교사 로돌프 퇴퍼가 1837년에 낸 ‘비외 부아 씨 이야기’는 한 면에 한 개에서 여섯 개의 칸을 배치하고 그 아래에 짧은 글을 붙인 형태였다. ‘비외 부아 씨 이야기’의 한 컷. 위키미디어코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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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의 역사는 길다. 인류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림을 통해 이야기를 전달해왔다. 기원전 이집트의 무덤 벽에는 씨를 뿌리고 거두어 창고에 쌓기까지의 순서가 그려져 있고, 11세기 프랑스에서 만든 길이 70m짜리 바이외 자수는 노르만정복의 전말을 한 폭에 이어 붙인 작품이다. 넓게 보면 모두 만화의 조상이라 할 만하다.

이 그림들과 현대 만화의 가장 큰 차이는 뭘까. 바로 장면과 장면을 가르는 경계가 없다는 점이다. 바이외 자수의 그림은 70m 내내 끊기지 않고 이어진다. 어디서 한 장면이 끝나고 어디서 다음 장면이 시작되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이런 그림을 읽으려면 옆에서 설명해주는 사람이 있거나, 보는 이가 이미 그 이야기를 알고 있어야 했다. 그림이 이야기를 담고는 있었지만 스스로 전하지는 못했다. 그 일이 가능해진 건 장면을 나누는 테두리, ‘칸’(Panel)이 발명되고 나서였다.

칸은 그림 하나하나를 테두리로 둘러 순서대로 늘어놓은 만화의 기본적인 표현 기법이다. 이 별것 아니게 보이는 테두리 하나가 하는 일은 생각보다 많다. 여기까지가 한 장면이라고 공간을 자르고, 그다음 칸이 다음 순간이라고 시간을 자르고, 이쪽에서 저쪽으로 읽으라고 순서까지 지시한다. 칸이 영화의 화면과 다른 점도 여기에 있다. 영화의 화면은 정해진 시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지지만, 만화의 칸은 지면 위에 계속 남는다. 그래서 독자는 앞 칸을 다시 볼 수도 있고, 마음에 드는 칸에 한참 머물 수도 있고, 지루하면 건너뛸 수도 있다. 영화는 관객이 보는 속도를 감독이 정하지만, 만화는 읽는 속도를 독자가 정한다. 칸은 수천 년간 이어진 그림이라는 정적인 매체를 탁월한 스토리텔링 미디어로 만든 발명이었다. 현대 콘텐츠산업을 바꾼 결정적 장면에 만화의 칸을 꼽을 수 있는 것도 이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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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만화산업의 태동

19세기 신문과 잡지에 실리던 만화는 대부분 한 컷짜리 만평이었다. 한 장의 그림은 상황을 요약하고 인물을 비꼬는 데는 더할 나위가 없지만, 많은 이야기를 전달하지는 못한다. 누가 무엇을 했고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담으려면 그림이 최소한 두 장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두 장을 나란히 붙인 사람이 스위스 제네바의 학교 교사 로돌프 퇴퍼다. 그가 1837년에 낸 ‘비외 부아 씨 이야기’는 한 면에 한 개에서 여섯 개의 칸을 배치하고 그 아래에 짧은 글을 붙인 형태였다. 독일의 문호 괴테가 원고를 보고 감탄해 출판을 권했다는 일화도 남아 있다. 순간에만 머무르던 그림에 ‘먼저’와 ‘나중’의 시간성이 생긴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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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칸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기능은 보이는 부분이 아니라 그리지 않은 부분에 있다. 작가는 칸의 내용을 그리면서 칸과 칸 사이에 벌어진 일은 그리지 않는다. 그 빈자리를 메우는 것은 독자의 상상력이다. 만화 이론가 스콧 매클라우드는 1993년 ‘만화의 이해’에서 칸과 칸 사이의 이 빈 공간을 홈통(Gutter)이라 불렀다. 이 홈통이 바로 적은 그림으로 많은 정보를 전달하게 하는 칸의 비밀이다. 1897년 미국 신문 연재만화 ‘카첸야머 키즈’에서 말풍선이 등장하며 칸은 인물의 말까지 담게 됐다. 그림 몇 장으로 긴 이야기를 전하는 현대 만화 미디어는 이렇게 완성됐다.

칸은 만화가 팔리는 방식도 바꿨다. 만평은 한 장을 그리면 그것으로 끝이지만, 연속된 칸은 독자에게 ‘다음’을 기다리게 했다. ‘연재’란 방식이 만들어진 것이다. 신문왕 조지프 퓰리처와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가 판매 경쟁을 벌이며 일요판 만화면을 키운 것도, 신문 만화가 여러 신문사에 이야기를 파는 배급업으로 자리 잡은 것도 모두 연재 덕분이었다. 그림 한 장은 팔고 나면 그것으로 거래가 끝나지만, 이어지는 이야기는 독자가 다음주에도 같은 신문을 사게 한다. 한 번 팔고 마는 상품에서 반복해서 파는 상품으로 넘어간 출발점이 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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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현대 만화 미디어를 탄생시킨 칸이지만 비주얼 스토리텔링 도구로서의 한계는 처음부터 명확했다. 칸은 반드시 종이 위에 놓여야 했고, 종이 크기는 정해져 있었다. 그래서 한번에 눈에 들어오는 칸의 수도, 칸과 칸 사이 여백의 폭도 어느 정도는 정해져 있었다. 한 장면을 몇 칸으로 쪼갤지, 그 칸을 얼마나 크게 쓸지는 이야기의 필요가 아니라 남은 지면이 정했다. 오늘날 북미 만화책의 표준 판형인 가로 6.625인치(약 16.8cm), 세로 10.25인치(약 26cm)가 1933년 미국 인쇄소의 한 직원이 신문지를 반으로 접고 다시 반으로 접어보다 찾아낸 크기에서 거의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 제약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보여준다.

디지털을 만난 만화

대신 종이는 다른 것을 줬다. 페이지를 넘기는 동작이다. 한 장을 넘기는 순간 앞의 칸들이 통째로 사라지고 새로운 칸이 한꺼번에 나타난다. 작가가 독자에게서 잠시 시야를 빼앗을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었다. 일본 만화는 이 순간을 연출로 바꿔냈다. 1940년대 일본 ‘만화의 신’이라 불리는 데즈카 오사무가 그 흐름의 창시자다. 일본 만화에서 종이를 넘기기 직전에 만나는 펼침면 아래 칸에 결정적 장면을 걸어두는 ‘메쿠리’가 곧 업계의 문법으로 굳었다.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장면이 놓이는 자리를 종이의 넘김이 정한 셈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형태를 갖춘 현대 만화는 그 뒤 1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큰 변화는 없었다. 그림 하나를 한 페이지에 통으로 넣어 칸을 크게 쓰는 연출이나, 고정된 칸을 이리저리 변형해 인물의 감정을 전달하는 연출 등 다양한 기법이 생겨났지만 칸을 담은 종이는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만화는 ‘책’이었고 출판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

한국이 만든 K-웹툰이 세계의 독자와 웹툰, 애니메이션, 영화 등 다양한 형태로 만나고 있다. K-웹툰의 저력, 향후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평가다. 네이버
한국이 만든 K-웹툰이 세계의 독자와 웹툰, 애니메이션, 영화 등 다양한 형태로 만나고 있다. K-웹툰의 저력, 향후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평가다. 네이버

오랜 기간 시장을 지배하던 칸의 변화는 엉뚱한 곳에서 시작됐다. 만화산업이 잘나가던 나라가 아니라, 만화산업이 통째로 무너지고 있던 나라, 한국이었다. 1997년 청소년보호법이 만화를 유해매체 심의 대상에 올리자 서점들이 만화를 진열대에서 빼기 시작했다. 곧이어 외환위기가 닥쳤고, 책을 사는 대신 빌려 보는 도서대여점이 판매를 대체하자 2000년부터 만화잡지가 줄줄이 문을 닫았다. 1990년대 중반 수십 종에 이르던 국내 만화잡지는 2010년대 후반에 이르러 열 종 아래로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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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할 지면을 잃은 작가들이 2000년대 초 포털 사이트로 옮겨간 것은 그래서다. 당시 포털은 이용자를 오래 머물게 할 읽을거리가 필요했고, 만화는 무료로 풀 수 있는 콘텐츠였다. 2003년 10월 강풀의 ‘순정만화’가 다음 커뮤니케이션의 ‘만화속세상’에서 연재를 시작하면서, 짧은 옴니버스가 중심이던 ‘웹 만화’의 자리에 장편 서사가 세로로 흐르는 화면 위에 얹혔다. 웹페이지의 화면에는 판형이 없었다. 접을 종이도, 넘길 페이지도 없으니 칸을 종이 규격에 맞춰야 할 이유 자체가 사라졌다.

이때 100년 넘게 만화를 규정하던 제약이 비로소 풀렸다. 종이에서는 언제나 같은 폭이던 칸 사이의 여백을 마음대로 늘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여백을 길게 두면 독자가 다음 칸에 닿기까지 시간이 늘어지고, 바짝 붙이면 순식간에 넘어간다. 종이에서 독자가 쥐고 있던 읽는 속도를 작가가 어느 정도 되찾았다. 세로로 긴 스마트폰 화면과 엄지로 밀어 올리는 동작이 그 뒤를 완성했다. 다들 아는 웹툰의 탄생이다.

새로운 캔버스를 만난 작가들은 곧 종이에서는 쓸 수 없던 연출을 시도했다. 공포 웹툰의 기다림 연출이 대표적이다. 무서운 장면 앞에 여백을 길게 늘여두면 독자는 빈 화면을 몇 번씩 밀어 올리다 갑자기 귀신과 마주친다. 한 페이지에 모든 그림이 한꺼번에 보이는 종이 만화에서는 불가능한 연출이다. 세로 스크롤은 한국 출판만화 시장이 무너져서 나온 고육지책이었지만, 디지털과의 궁합은 그야말로 최고였다.

한국계 웹툰 플랫폼의 힘

반면 만화 강국 일본은 웹툰의 등장 이후로도 20년 넘게 종이에 집착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바꿀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잡지에 연재해 부수를 만들고, 단행본으로 묶어 팔고, 애니메이션과 굿즈로 넘기는 구조로도 산업이 잘만 돌아갔다. 종이에 모든 것을 담는 문법이나 그 문법에 훈련된 작가와 편집자도 그대로였다.

하지만 20여 년이 지나고 시대의 변화는 그 견고하던 일본의 출판 시장마저 변화시키고 있다. 2025년 일본 만화 시장에서 전자만화가 차지하는 비율은 무려 76.1%까지 올랐다. 종이 만화잡지 매출만 따로 보면 한 해 만에 12.7%가 준 것이다.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한국계 웹툰 플랫폼이었다. 결국 2024년에는 종이를 고집하던 슈에이샤마저 세로 스크롤 앱 ‘점프툰’을 창간하면서 출판만화의 입지는 점점 줄고 있다. 물론 출판만화가 하루아침에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이제 만화라고 하면 만화책이 아닌 웹툰을 떠올리는 시대가 된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돌이켜보면 만화의 역사는 그림을 어떻게 배열하느냐의 역사였다. 테두리 하나가 그림에 순서와 시간을 부여했고, 그 테두리를 늘어놓는 방식이 읽는 속도나 독자의 감정까지 정했다. 그 배열이 바뀔 때마다 만화산업의 형태도 매번 바뀌었다. 지금 세로 스크롤의 배열이 점점 기존 ‘칸’을 밀어내는 것처럼 말이다.

흥미로운 점은 세로 스크롤이라는 새 캔버스가 만화 강국이 아니라 한때 만화 시장이 통째로 붕괴된 나라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지킬 것이 가장 적은 쪽이 가장 먼저 움직이는 법이기 때문이다. 잃을 것이 없었기에 과감할 수 있었고, 그것이 지금 세계 표준이 돼가는 K-웹툰의 시작이 된 것은 어쩌면 꽤 ‘만화’ 같은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문동열 콘텐츠산업 칼럼니스트 rabike0412@gmail.com

문동열 칼럼니스트는 업계 경력 20년 이상의 콘텐츠산업 전문가다. 글로벌 콘텐츠 제작자로 활동하며, 콘텐츠 제작과 금융이 전문이다. 일본 게이오대학원을 졸업하고 LG인터넷과 SBS콘텐츠허브 등에서 방송·게임·영화 등 다양한 콘텐츠의 기획과 제작을 맡았다. IBK기업은행에서는 콘텐츠 금융과 관련한 시스템 구축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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