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중박 분장놀이’ 즐겼다면…답십리로 가자, 나만의 골동품 찾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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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가장 인기 있는 줄임말은 ‘국중박’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을 줄여 부르는 이 말은 세련과 성찰, 위트를 상징한다. 과거 유물 전시장은 노년층이나 초중고 역사 수업 일환으로 학생들이 찾는 지루한 공간으로 취급됐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유물이 가장 힙하다. 지난 9월19일 열린 ‘2026 국중박 분장놀이’의 대성공이 이런 사실을 방증한다. 대회 소제목은 ‘내 안에 잠들어 있는 유물을 깨워낼 시간’.
‘내 안의 유물을 깨울’ 장소가 서울에는 또 있다. 엠제트(MZ) 세대가 눈도장 찍은 곳인 ‘답십리 고미술 상가’다. 요즘 이곳이 붐빈다. 젊은 세대뿐만 아니라 외국인 관광객까지 단골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여기다 카페 창업자, 전시 기획자, 패션업계 종사자, 문화 공간 설계자들도 합류하고 있다.
‘답십리 고미술 상가’는 서울 동대문구 주상복합 아파트인 삼희아파트의 상가를 말한다. 서울 지하철 5호선 답십리역 1번 출구로 나가면 만난다. 아파트 2동과 3동, 5동, 6동 상가가 고미술 상가다. 2동에 발을 들였다. 좁은 복도 양쪽에 고미술품 가게가 도열해 있었다. 가게마다 색과 모양, 제작 연도가 다른 각종 골동품이 즐비했다. 수집 가치가 있는 ‘거물’ 골동품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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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전통을 담은 물건들이 정말 아름답습니다.” 독일에서 온 여행객 틸 슈푸르니를 만났다. 친구와 이곳을 방문한 그는 에스엔에스 영상을 보고 단박에 한국 여행 목록에 이 상가를 올렸다고 했다. 자신과 같은 외국인이 많다고도 했다. 낡고 낡았던 이곳이 글로벌 여행지로 훨훨 날 준비를 마친 모양이다.
그가 기웃거린 ‘장미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 조선시대 양반을 형상화한 목각 인형, 연적, 사기, 유기 주전자 등 작은 크기의 골동품부터 문구나 서신, 서책 보관용이었던 문갑, 경대 등 ‘덩치’가 큰 옛 물건 등이 가득했다. 장미방 주인 이점숙(71)씨는 가게를 운영한 지 30년 됐다. 그의 남편 윤갑영(74)씨는 다른 동에서 같은 이름의 가게를 운영한다. 윤씨는 취미로 수집하다가 아예 가게를 연 이다. 40년이 넘었다. “지방을 다 훑고 다니면서 구입했다”고 이씨는 회상했다. “코로나 이후로는 경매로 구입하는 편”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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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가 역사가 궁금하다. “(1970년대~80년대 초 고미술 거래업자들은) 황학동, 신설동에 흩어져 있었고, 인사동에도 있었는데, 인사동은 임대료가 너무 오르기 시작해 거의 쫓겨나다시피 했죠. 인사동이 변질되기 시작한 거였어요. 먹을거리와 옷, 관광용품 파는 데로요. 청계천에도 (업자들이) 있었는데, 공사를 시작하니깐 나와야 했어요. 80년대 초 이 건물로 다 모여들었어요.” 동대문구 자료를 보면 1980년대 초부터 형성된 이 상가엔 25만여점의 고미술품이 소장돼 있다고 한다. 국내 최대 고미술 상가란다. 고서화, 고가구는 물론 나무 촛대, 괘종시계 등 각종 앤티크 소품도 넘친다고 전한다. 현재 140여개 점포가 밀집해 있다고 한다.


형성 과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증언하는 이도 있다. 26년 역사의 ‘예명당’ 정영섭(67) 대표는 1970~80년대 정부가 주택 공급을 위해 추진한 ‘아시아개발은행(ADB) 차관 아파트’를 언급했다. “본래 아시아개발은행 차관으로 지은 2층짜리 아파트형 공장이었는데, 분양이 안 돼서 설계 변경해 (지금 같은) 9층짜리 상가아파트가 되었다고 해요. 구입해도, 전세로 들어와도 저렴했기에 아현동, 황학동 등에 있던 이들이 많이 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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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같은 인기는 언제부터였을까. 이점숙씨는 “(예전엔) 인테리어업자나 본국으로 돌아가는 미군들이 왔었지요. 미국, 일본 등 외국 장사꾼들도 여기 와서 많이 사 갔죠. 일반인들은 없었는데, 지난해부터 젊은 사람이 많이 오기 시작했어요.” 이유는 여러 가지다. ‘국중박’의 인기에서 보듯 예스러운 우리 것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 우아한 곡선과 단아한 모양새 등 다른 나라에선 찾기 어려운 우리 골동품만의 미학이 새롭게 조명받으면서 가치가 상승한 게 한 이유다. 이런 가치 상승을 이끈 이들은 에스엔에스로 정보를 취합하는 젊은 층이다. 이들은 우리 골동품에 대한 새 관점을 만들었다.
지난해부터 들어선 소품 가게 ‘고복희’와 ‘호박 포크 아트 갤러리’, 고미술 큐레이션 숍 ‘오브’ 등의 역할도 컸다. 이들 가게 주인들은 젊은 층의 감성을 간파한 걸로 보인다. 오브의 대표 최원석씨는 저서도 있는 유명 공간 기획자다. 성수동 팝업 열풍의 주역으로 불리는 ‘프로젝트 렌트’가 그의 회사다. 평소 골동품 수집가였던 그는 이 상가의 단골이기도 했단다.



예명당 정영섭씨의 아내 장옥순(61)씨는 낮엔 천으로 만드는 누빔 함을 만들고 오후 1시부터는 가게 안에서 말차를 만든다. 말차 찻잔은 고려시대 말 골동품이다. 600년 전 찻잔이다. 정성스럽게 600년이나 1천년 전 찻잔으로 다도를 진행하며 손님에게 말차를 제공하는 영상이 유튜브를 타고 퍼졌다. 마침 젊은 층 사이에서 세련된 트렌드로 퍼지고 있는 다도 문화와 궤를 같이하게 된 것이다. “오래전부터 우리 것이 무시되는 게 안타까웠고, 큰일이라고 생각했다”는 그는 ‘먹는 골동을 하자’란 취지로 차를 우리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장씨의 다도는 돈을 받고 제공하는 프로그램이 아니다. 그저 우연히 들른 이가 장씨를 만나면 이뤄지는 예고 없는 이벤트다. 그는 여러 차례 낯선 이와 차를 가운데 두고 대화를 나눴다. 장씨는 “이런저런 자신의 우울한 얘기를 하는 이도 있고, 그러다 보면 힐링 된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고 한다. 18년간 유럽 여행 가이드로 활동한 류아무개(42)씨는 장씨의 차 한잔은 특별하다고 말했다. “외국인 친구에게 한국 여행 스케줄을 다 짜줬는데, 그가 명동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다른 외국인 여행객이 이곳을 알려줬다는 거예요. 여기서 맛본 차 경험이 한국 여행에서 최고의 경험이었다고 하더라고요. 한국인으로서 부끄러워서 찾아와봤어요.” 호로록 짙은 녹색의 말차에 600년 전 고려시대 풍광이 어른거리는 듯했다. 정영섭씨가 1천년 전 제작된 사기를 기자에게 건넸다. 손이 떨렸다. 깨지면 큰일이다. “손님이 깬 적은 없는데, 깨진다면 그 골동품이 소명을 다한 거라고 생각한다”고 정씨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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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동 안으로 들어갈수록 ‘역사 스페셜’이 펼쳐진다. 이 골목에서 가장 오래된 가게는 ‘동인방’과 ‘만복당’이다. 만복당에 들어서면 벽 한쪽을 가득 메운 자수 골동품이 눈에 들어온다. 알록달록한 색들이 화려하다. 궁을 배경으로 하는 사극 한복판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대표는 차순례(70)씨다. 천을 자르고 오리며 작업하는 그의 얼굴에서 우리 공예 역사를 지켜온 이의 넉넉한 품이 느껴졌다. “이젠 수놓는 이도 적어요. 아쉽죠.” 그의 말투에서 쓸쓸함이 묻어났다. 만복당에는 이름 그대로 만가지 볼거리 골동품이 있다. 빠져든다. 맞은편 ‘가화’는 “가장 한국적인 것(고미술품)을 잘 정돈해둔 곳”이다.


이곳은 지금 변화하는 중이다. 최근엔 ‘공예로운 미식 생활을 지향’한다고 안내서에 적은 ‘소요상회’와 빈티지 오디오 전문 숍 ‘전파상회’가 문 열었다. 소요상회는 간단한 차와 먹거리를 즐길 수 있는 데다. 전파상회는 20년 넘은 오디오 컬렉터인 인테리어 디자이너이자 티스(TIS) 갤러리의 대표인 이정엽씨가 공간을 구성한 곳이다. 문외한이 봐도 입이 벌어지는 근사한 오디오가 빼곡하다. 예약제로 운영한다. 전파상회 인스타그램에 신청하면 된다. 다소 이질적인 공간도 이 골목에 문 열었다. 유럽 빈티지 가구 쇼룸이자 판매 가게인 ‘이함에디션’이다. 경기도 양평에 있는 복합문화공간 이함캠퍼스가 운영한다. 5동엔 다도와 전시를 병행하는 문화 공간 ‘디디디 스페이스’(ddd Space)가 최근 문 열었다. 개관전으로 다도 수집가 윤삼웅 선생의 수집품을 선보였다.
종일 이 상가를 다녀도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이곳에서 역사는 거꾸로 흐른다. 우리 것에 몰입하다 보면 차분해진다. 골동품에 스민 선조의 삶이 어른거린다. 최근 몇년 새 중국 골동품도 선보이는 터라, 우리 골동품에만 푹 빠지고 싶은 이라면 꼼꼼히 살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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