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의 취향]비욘세·U2 무대 만든 에스 데블린···1만권 책으로 만든 ‘움직이는 도서관’
거울로 이루어진 ‘미러 메이즈’. 배문규 기자
‘주말의 취향’은 지면에 다 담기 어려운 문화 현장의 소식들을 풀어서 전합니다. 마음은 가볍게, 생각은 깊이 할 수 있는 작품을 소개합니다.
책 1만여권이 벽을 가득 채운 방. 보통 책등이 보이도록 꽂지만, 이 책들은 잘려진 종이의 하얀 단면이 드러나는 책배가 보이도록 거꾸로 꽂혀 있습니다. 불이 꺼지자 1만여권의 책들이 거대한 스크린으로 변합니다. 이미지가 살아 움직이는 도서관입니다. 책 위로 동물과 사람의 형상이 신비롭게 떠올랐다가 사라집니다. 작가의 드로잉과 문장이 흐르던 영상이 끝나는 순간 책장 두 면이 양쪽으로 열립니다. 영화 속 서재에 숨겨진 비밀문이 열린 듯합니다.
문 너머에는 사방이 거울로 둘러싸인 미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벽과 천장에 반사된 이미지가 무한히 이어지는 듯합니다. 자신의 얼굴을 찾다가 어느 순간 다른 관람객과 눈이 마주치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새로운 장면이 만들어집니다. 관람객 자신도 작품의 일부가 됩니다.
에스 데블린. 푸투라서울 제공
이 장면을 만든 사람은 영국 출신 시각예술가 에스 데블린(55). 서울 종로구 푸투라서울에서 지난 20일 개막한 ‘세 번째 시: 에스 데블린, 다시 집으로’는 그의 국내 첫 개인전입니다.
데블린은 왕립오페라하우스의 오페라와 연극 무대에서 출발해 U2와 비욘세, 아델, 켄드릭 라마 등의 공연 무대를 설계한 세계적인 무대 디자이너입니다. 2012년 런던 올림픽 폐막식과 2022년 슈퍼볼 하프타임쇼도 그의 손을 거쳤습니다.
데블린은 지난 14일 기자간담회에서 무대 연출의 경험이 미술 작업으로 어떻게 이어졌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10만명이 넘는 관객이 노래 한 곡으로 하나가 되고, 200명이 모인 작은 공간에서는 한 구절과 한 장면 전환으로 생각이 바뀌는 것을 지켜봤습니다. 슈퍼볼이나 비욘세의 공연이든 갤러리든 제 질문은 같습니다. 관객이 무엇을 보고 무엇과 마주했는가. 저는 이를 ‘거대한 규모의 친밀함’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경험은 전시의 바탕이 됩니다. 데블린은 전시장을 하나의 무대처럼 구성합니다. 건축의 구조와 동선에 맞춰 작품을 배치하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자연광과 정원 풍경을 작품의 일부로 끌어들였습니다. 관람객은 공간을 이동하며 작품의 메시지를 감각하게 됩니다.
전시는 타인과의 연결에서 비인간 존재와의 공존으로 주제를 확장합니다. 책에서 들려오는 타인의 목소리와 거울 속 낯선 얼굴을 거쳐, 도시를 함께 살아가는 생명체로 시선을 넓힙니다.
‘인피니트 라이브러리’가 서로 다른 시대와 언어를 살아온 이들의 목소리를 불러낸다면, ‘미러 메이즈’는 자신을 보려던 시선으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게 합니다. 데블린은 “자신을 보기 위해 준비된 시선으로 타인을 바라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스크린쉐어’에서는 데블린이 30여년간 축적한 스케치 가운데 한 장을 가져갈 수 있고, ‘콜렉티브 포트레이트’에서는 낯선 사람의 얼굴을 그려 자신의 흔적을 남깁니다. 작가와 관람객, 관람객과 관람객이 서로 흔적을 주고받게 되는 셈입니다. 이 연결은 ‘다시 집으로’에서 인간 바깥으로 확장됩니다. 서울과 런던에서 마주한 생명체 250종의 모습과 소리, 8개 언어의 합창이 어우러집니다.
타인과의 연결, 비인간 존재와의 공존이라는 메시지가 새삼스럽진 않습니다. 이를 한 편의 무대처럼 직접 경험하게 만드는 연출이 전시의 매력입니다. 비밀문처럼 열리는 책장과 사방을 비추는 거울, 한 장씩 사라지는 스크린은 사진으로 남기기에도 좋습니다. 내년 1월17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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