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업무상 질병, 인정 문턱 넘어 적정 치료 논의 함께해야
업무상 질병 판정 제도는 일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최소한의 사회안전망이다. 현재 제도에 개선이 필요한 지점이 적지 않지만, 우선 제도의 취지를 잘 살리기 위해 다음의 몇가지를 함께 논의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추정의 원칙’의 역설이다. 근골격계 질병의 ‘추정의 원칙’ 제도는 업무 관련성을 판단하는 과정을 간소화하고 노동자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장치다. 상병, 직종, 근무기간, 신체부담업무를 중단한 후 최초 진단까지의 유효기간 등 일정 요건을 충족하면 업무 관련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하도록 한 일종의 신속심사 제도다.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지만 현실에서는 오히려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작동하기도 한다. 요건에 조금이라도 미치지 못하면 오히려 업무 관련성이 없다고 획일적으로 판단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추정 기준은 인정 판단 절차를 간소화하기 위한 것이지, 기계적으로 인정을 배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기준에 미달한 사례일수록 개별 상황을 더욱 면밀히 살펴보는 것이 제도의 취지에 부합한다.
다음은 상병 수준을 평가하는 방식이다. 임상 경험은 스스로 병원을 찾은 환자에게 집중되기 때문에, 상병 수준 평가 시 진료실 환자 중심의 선택 편향이 발생할 수 있다. 증상이 뚜렷한 일반 환자들과 비교하다보면, 일하며 질환을 관리해온 노동자의 상태는 실제보다 과소평가될 위험이 있다. 여기에 ‘건강근로자효과’라는 개념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는 노동자가 직업을 유지하기 위해 오히려 건강 상태를 관리하는 경우가 많아 일반 인구보다 질병 발생이 낮게 관찰될 수 있다는 역학적 개념이다. 환자가 아닌 일반 인구를 기준으로 한 충분한 연구 자료가 축적되지 않은 상황에서, 병원을 방문한 환자군을 경험적 기준으로 삼아 동일 연령대 노동자의 상병 수준을 판단하는 데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물론 상병을 쉽게 인정하는 것에 대한 우려도 이해할 수 있다. 경미한 질환까지 폭넓게 산업재해로 인정하면 과잉 진료나 사회보험 관련 도덕적 해이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잉 진료를 막기 위해 상병 자체를 엄격하게 부정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를 만든다. 실제 질환이 있는 노동자가 적절한 시기에 치료받지 못하고, 결국 병이 악화된 뒤에야 치료를 받게 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결국 관리해야 할 대상은 상병 인정이 아니라 치료의 적정성이다.
업무상 질병 판정 과정을 효율적으로 개선하기 위해서는 판단체계를 보다 기능적으로 분리할 필요가 있다. 현재 업무상 질병 판정위원회의 혼재된 위원 구성을 영역별로 구분해, 업무 관련성은 작업환경과 노출 특성을 가장 잘 이해하는 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가 판단하고, 상병 여부와 중증도는 해당 부위 전문의로 구성된 별도 위원회가 평가하는 방식을 고려해볼 만하다. 여기에 치료의 적응증과 기간, 재활의 필요성, 수술의 적절성 등을 객관적으로 검토하는 절차가 더해진다면 불필요한 치료는 줄이고 필요한 치료는 놓치지 않을 수 있다.
업무상 질병 판정의 목적은 치료가 필요한 노동자를 보호하는 데 있다. 산재 노동자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지속 가능한 제도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이제 ‘질병 인정’을 넘어 ‘적정 치료’까지 함께 논의해야 한다. 그것이 노동자를 보호하면서도 제도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더욱 높이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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