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돌아선 피난길, 이보다 더 독할 수는 없었다 [금자⑯]

광고
편집자 주 : 국가권력에 의해 ‘프락치’로 몰려 구원받지 못한 채 북으로 간 국회의원들. ‘금자’는 소녀 금자의 시선을 따라 70년이 훌쩍 넘은 그 시간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대한민국 친위쿠데타와 내란의 기원을 마주한다. 월화수목금 연재.
내려가느냐, 다시 올라가느냐.
12살 금자는 천안삼거리 길바닥에 주저앉아 8살 난 동생 호각과 의논을 했다. 동쪽으로 가면 상주·대구가 나왔고, 더 가면 부산이었다. 서쪽은 전주·논산·광주로 가는 길이었다. 북쪽으로는 평택과 오산, 안양을 거쳐 서울이 나올 것이다. 서울 명동 집에서 천안까지 일주일 넘게 걸어왔다. 그런데 목적지인 부산 고모부 집으로 갈지, 아니면 다시 온 길을 되밟아 서울로 갈지 결정해야 하는 갈림길에 섰다.
안양역에서 길이 어긋난 6살 동생 호완 때문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납치된 뒤 동생들과 함께 명륜동 혜명보육원으로 몸을 옮겼지만, 한 달도 안 돼 1·4후퇴로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2살 호기를 업은 채 8살 호각의 손을 잡고 꽁꽁 언 한강 다리를 건넜다. 다행히도 보육원 소사 부부가 달구지에 쌀봉지 등 가재도구를 싣고 따라와 줬다. 달구지엔 6살 호완도 태웠다. 때로 좁은 산길도 가야 했는데, 달구지는 그럴 수 없었다. 따로 가다가 안양역에서 만나자고 했다. 하지만 안양역에 닿아 한나절을 기다려도 호완과 달구지를 끄는 소사 부부는 나타나지 않았다. 안양역은 폭발사고가 난 직후라 건물은 무너져 있고 광장엔 큰 웅덩이가 여러 개 파여 있었다. 사람이 많이 죽었다고 했다.
광고
일단 피난 행렬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왔다. 오는 내내 ‘이러다가 동생 하나를 영영 잃는 게 아닌가’ 하는 찜찜함이 죄책감으로 변하려 하고 있었다. 천안에서는 양단간에 결정을 내려야 했다. 더 이상 남쪽으로 가면 돌아갈 기회를 놓칠 수 있었다. 호각이 일주일째 머리를 못 감아 거지꼴을 한 몰골로 말했다.
“누나, 나는 호완이 서울로 갔을 거 같아. 더 가깝잖아.”
광고
광고
금자도 같은 의견이었다. 안양에서 부산은 까마득했다. 호완이 폭격에 맞아 죽지 않았다면, 백번 생각해도 서울을 택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서울로 되돌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남쪽으로 오는 피난민들이 놔주지 않았다. “왜 돌아가냐”고 물었다. 동생 잃어버려 찾으러 간다고 하자 “이 난리통에 애들끼리 서울을 어떻게 가느냐”며 말리고 등을 떠밀었다. 그렇게 다시 반강제로 남쪽으로 내려오기를 몇 차례 했지만, 금자는 끝내 마음을 다잡아 서울로 향했다.
“무섭지 않으셨어요?”
광고
“그때는 무서운 게 없었죠.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동생을 만나야겠다는 것 말고는 아무 생각도 안 났어요.”
“서울로 갈 때는 어떠셨어요?”
“두꺼운 털옷을 입은 중공군들과 만났어요. 우리한테 장난을 치면서 남쪽으로 가라는 손짓을 했어요. 아, 중공군이 무섭지 않구나 생각했어요.”
“중공군, 그러니까 중국 군대가 있는 지점에 미군이 폭격을 심하게 했을 텐데요.”
광고
“서울로 올라갈 때는 내려올 때보다 폭격이 심하지 않았던 거 같아요. 다행이죠. 폭격해도 무섭지 않았고요.”
강금자 여사님과 다섯 차례 만났다. 라일락이 피던 4월에 첫 인터뷰를 하고 한여름 폭염주의보가 떨어지기 직전인 7월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았다. 폭염주의보가 폭염경보로 격상되던 8월, 여섯 번째 약속을 잡았다. 그 사이사이 카카오톡 메신저(카톡)로 대화했다. 아파트 방충망에서는 매미가 따갑게 울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푹푹 쪘던 한여름에, 그 어느 때보다 추웠던 그해 겨울에 대한 이야기가 카톡으로 오갔다.
19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 뒤 낙동강 전선에서 최후 방어선을 쳤던 유엔군과 국군은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되찾았다. 내처 북으로 진격했다. 그리하여 평양을 점령한 날이 10월19일이었다. 끝없는 북진 끝에 평안북도 초산의 압록강변에 태극기를 꽂은 시점은 10월26일이다. 하지만 이미 중국군 본대가 북한을 돕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삭주·만포진의 세 지점에 도달해 있었다. 국군은 태극기를 꽂고 대통령 이승만 진상품으로 압록강 강물을 수통에 담았다는 중국 국경인 초산에서 중국군에게 궤멸적 패배를 당했다. 이어 미군은 11월과 12월 장진호 전투에서 중국군과 맞붙어 1만명 넘게 전사했다. 후퇴가 시작됐다. 크리스마스까지 흥남 철수작전이 이어졌다. 전세를 뒤집고 파죽지세로 내려온 중국군은 12월31일 38선을 공격해 넘어왔다. 이른바 ‘신정 공세’였다.
정부는 유엔군이 평양을 포기하던 12월 중순 무렵부터 동빙고와 마포에 부교를 설치해 부녀자와 노약자들이 먼저 피난하도록 포고문을 게시했다. 12월24일에는 서울 시민 피난령을 내리고 이듬해 1월3일 임시수도를 부산으로 결정했다. 금자가 한강을 건너 처음으로 피난을 떠난 시점은 크리스마스와 신정 사이였다.
두 번째 서울 철수였다. 전쟁 발발 직후 여름에 한 번, 그리고 혹한기에 또 한 번. 바로 이 1·4후퇴 때 서울과 그밖의 지역에서 남쪽으로 내려간 피난민이 220만명에 이르렀고 전국적으로 764만여명이 피난길에 올랐다는 게 국방부가 펴낸 ‘6·25 전쟁사’의 통계다.
2살 호기를 업은 채 공안원에 연행된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연락을 받고 간 을지로 인근의 군부대에서 작은 오빠가 받아온 호기는 지금 금자의 등에 업혀 있었다. 호기는 내려놓으면 울었다. 엄마에서 누나로 옮겨간 호기는 오직 사람 등에만 껌딱지처럼 붙어있었다. 금자는 밥 먹을 때도, 잘 때도, 화장실 갈 때도 호기를 업었다. 잘 때가 가장 큰 문제였는데, 방법을 찾았다. 이불을 쌓아놓고 그 위에 이마를 댄 채 엎드려 자는 거였다. 동생도 쿨쿨 잘 잤다. 금자 등에 붙고부터 똥오줌을 가리기 시작한 일이 그저 감사하기만 했다.
기온은 영하 18도와 20도 사이를 오갔다. 한반도 전역이 북만주 방면에서 내려온 강한 대륙성 고기압 영향을 받아 매섭게 추웠다. 역사적 혹한이라고 했다. 아무리 추워도 다른 피난민들과 함께 쉼없이 걸으면 견딜 만 했다. 가장 큰 두려움은 공중폭격이었다. 천안까지 오는 동안 숱하게 고비를 넘겼다. 폭격기가 폭탄을 떨어뜨리기 전엔 먼저 정찰기가 찾아왔다. ‘웽’ 하는 정찰기 소리는 전쟁 초반 서울에 있을 때부터 익숙했다. 큰길을 지날 때는 산길로 급히 피해야 했고, 밤에 빈집에 머물 때는 급하게 밖으로 나와야 했다. 어느 집에서는 한 방에 사람이 너무 많아 마루 건너방으로 밀려간 사람들이 폭탄 파편을 맞았다. 그날도 초저녁에 정찰기 소리가 그치자마자 바로 옆에서 귀를 찢는 폭음이 울렸는데, 금자는 사람들의 비명을 들으며 두 동생과 함께 탈출에 성공했다.
그 정찰기는 경량의 프로펠러기 T-6이었다. T-6은 모기가 우는 듯 윙윙대는 소리를 내며 전선 부근을 오간다 해 ‘모스키토’(mosquito)라 불렸다. 모스키토가 상공을 저고도로 선회하며 뒤따라오는 폭격기 슈팅스타(F-80), 무스탕(F-51), B-26 경폭격기에게 표적을 전달하면 무자비한 폭격이 가해졌다. 정찰기가 모기라면, 전폭기는 무서운 말벌이자 폭군이었다.
금자는 그렇게 밤낮으로 호기를 업고, 8살 호각의 손을 잡은 채 말벌의 독침을 피해 일주일 이상 무사히 천안까지 내려온 그 길을 다시 올라가고 있었다. 6살 호완이는 똑똑한 아이였다. 폭격을 피해 서울로 갔다면, 분명 명동 집으로 올 거라고 여겼다. 그 확신이 없다면 고단함을 무릅쓰고 되돌아갈 이유가 없었다. ‘제발 집에 와있어다오’ 그렇게 빌며 걷고 또 걸었다. 일주일 넘게 가야 했다. 소녀가 이보다 더 독할 수는 없었다.
<다음 회에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참고한 책
‘폭격-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김태우 지음, 창비, 2021)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추적한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과 유해발굴을 통해 한국전쟁의 상흔을 드러낸 ‘본헌터’를 썼다. 그밖의 지은책으로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가 있다.
KioskNews shows a cleaned-up reading view extracted from the publisher’s page — the original always lives on their site, not ou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