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당연하지 않은 추석
이번 추석 연휴는 예년보다 길다는 느낌은 아니다. 대체공휴일 추가 지정 여부가 잠시 논의되는 듯하다가 곧 사라진 것을 보니 아마 올해는 이대로 지나갈 모양이다. 명절에 귀향하는 것이 전통적인 모습이라면 근래에는 가족과 여행을 떠나는 경우도 늘고 있다. 변화는 있으나 어느 경우든 이 가을에 추석 명절이 우리에게 환기하는 이미지는 넉넉함이나 따뜻함일 것이다.
다만 그 이미지는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 상황을 가정한다. 돌아갈 고향과 다시 만날 친지와 가족들, 그들의 건강상태까지 모두 포함해서 말이다.
병원에서는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그곳의 시간에는 달력의 붉은 숫자나 대체공휴일을 둘러싼 논의가 전혀 다르게 새겨진다.
예컨대 연휴의 길이는 당직 의료진에게 일정 의미에서 긴장의 척도가 된다. 평소보다 적은 인원으로 상당한 의료 수요를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연휴의 길이가 휴식의 질을 결정하는 바깥세상과 달리, 명절이 가져다주는 일탈은 병원 안에서는 업무 부담의 문제로 직결된다. 그래서 명절 연휴에 당직 의료진에게 무탈한 하루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보다 간절하다.
명절의 병원 분위기가 가져다주는 의미의 ‘다름’은 환자와 보호자에게도 그대로 통용된다. 프랑스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는 인간을 집에서 나와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존재로 묘사한다.
최근 영화화된 <오디세이>에서도 주인공은 칼립소가 약속한 영생마저 마다하고 집으로의 복귀를 선택한다. 인간의 중심에 다름 아닌 ‘집’이 놓여 있다는 바슐라르의 통찰은 명절의 병원이라는 시공간에서 특히 유효하다. 환자가 집이 아닌 병원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명절을 상상하고 보내는 방식이 상당히 달라지는 까닭이다. 환자는 퇴원을 희망하지만 퇴원이 가능하다면 의료진도 굳이 명절까지 입원을 유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 염원은 이미 이루어질 수 없는 한계를 안고 있다.
짧은 면회시간을 이용해 휴게실의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밀폐용기에 담아온 음식을 비우는 보호자들의 풍경은, 명절이라는 관행을 둘러싸고 흔히 말해지는 휴식이나 소비의 기호와 현실이 얼마나 동떨어질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들이 나누는 짧은 덕담에는 풍족함에 대한 기쁨 대신, 삶의 지극히 평범한 상태-‘아프지 않고 살아가는 것’-로 복귀하고 싶다는 간절함이 담겨 있다. 당직 근무 중 면담한, 오랜 간병에 지친 보호자의 눈에서 검사 결과 하나에 낙담과 희망이 교차하는 것을 읽을 때, 명절이 무사하게 지나기를 바라는 마음은 그들도 의료진과 다르지 않음을 안다.
명절의 풍요와 넉넉함이란 결국 사회가 가정한 ‘정상성’의 틀 안에서만 유효한 감각이다. 돌아갈 집과 고향이 있고, 마주 앉을 가족이 무탈하며, 그 관계를 떠받칠 신체적·경제적 조건이 갖춰진 이들에게만 명절은 비로소 축제가 된다. 명절의 병원은 그 정상성의 조건에 균열이 생긴 현장이자, 그 틈을 메우기 위해 누군가의 노동과 감정이 투입되는 고단한 시공간이다.
결국 병원에서 맞이하는 추석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가 매년 당연하게 누려온 명절의 온기가 실은 무탈함과 평범함의 지속이라는 커다란 행운에 의존해온 게 아닌지를, 그리고 그 온기의 그늘에서 누군가는 여전히 삶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고 있음을 말이다. 그들에게 병실 창문 너머로 떠오르는 보름달은 풍요의 증표라기보다, 잃어버린 일상을 비추는 서늘한 반사광일 수 있다.
명절의 의미를 조금 더 깊이 이해하는 일은 우리에게 찾아오는 추석이 누구에게나 같은 얼굴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데서 시작한다.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은, 그래서 언제나 당연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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