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언제 노인이 되는가, 노인은 어떻게 침묵당하는가 [.txt]
‘계급 탈주자’ 디디에 에리봉
죄책감·수치심 위 지적 분석으로
어머니 ‘노인’의 발언권 박탈 꿰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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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진의 프랑스 문학 식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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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제 성인이 되는가. 만 19살이라는 숫자처럼 청소년과 성인을 가르는 기준은 명확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노인이 되는가. 제도적으로는 65살을 기준으로 삼지만 체감은 사뭇 다르다. 우리는 여전히 일할 수 있고 어제와 다름없다고 느끼지만, 지하철에서 불쑥 자리를 양보받고 타인의 시선이 우리를 ‘노약자’ 칸으로 분류할 때 비로소 노년의 문턱을 자각한다. 우리를 노인으로 만드는 것은 신체적 노화 그 자체보다 우리를 둘러싼 사회의 시선과 호명이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사회학자 디디에 에리봉에게 노년은 모든 범주 바깥으로 고립된 상태다. 생산성을 상실해 경제적 범주 바깥에 있고, 요양원과 병실에 갇혀 사회적 시선 바깥에 머문다. 그들의 자리는 견고한 벽 안쪽이며, 그 목소리는 벽을 뚫고 나오지 못한다. 이것은 에리봉 어머니의 이야기이자 수많은 노인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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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스로 되돌아가다’에서 노동자 계급 출신, 성 소수자로서 겪은 폭력, 가족과의 단절을 계급 전향자의 목소리로 들려준 에리봉은 ‘어느 서민 여성의 삶, 노년, 죽음’에서 어머니의 이야기로 시선을 옮긴다. 책의 도입부에서 어머니는 랭스 외곽의 작은 마을 핌(Fismes)에 자리한 요양 시설로 거처를 옮긴다. 전작에서 노동계급 도시 ‘랭스’가 호출되었듯, 이번에도 ‘핌’이라는 지명은 여러번 반복된다. 에리봉에게 장소는 계급적 위치와 사회적 배제를 드러내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랭스를 떠나 파리 중심부로 진입했던 이 계급 전향자는 자신이 떠나온 곳으로 되돌아가는 데서 멈추지 않고, 랭스보다 더 변방인 핌의 수용 시설로 향한다. 어머니가 남겨진 곳, 작가 자신이 어머니를 데려다 놓은 바로 그곳이다. 그는 어머니의 이동을 ‘과거와 현재로부터의 뿌리 뽑힘’이라 설명한다. 스스로 뿌리를 뽑고 나온 아들이 늙은 어머니를 삶의 터전에서 뿌리 뽑았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어머니의 죽음을 앞당겼다는 모순은 생의 서글픈 역설이다. 그리고 바로 그 단절에서 모든 이야기가 탄생한다. 이제 문제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이다. 누군가는 감상적인 서사를 기대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에리봉은 친모에게 버려져 식모와 가정부, 공장 노동자로 살았던 한 여인의 삶에 정치적·계급적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니 이것은 그저 한 서민 여성이 아닌, 20세기 프랑스 하층 노동계급의 삶을 증언하는 ‘어느 민중 여성’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지배 계급의 언어에서 소외된 채 살면서도 로맨스 소설을 즐기고 인종적 편견을 드러내기도 했던 어머니의 모순과 욕망은 사회와 역사에 맞물려 있다. 그렇기에 에리봉에게 어머니의 늙음과 죽음을 기록하는 일은 결코 사적 애도에 머물 수 없었을 것이다.
에리봉처럼 자신이 속했던 세계를 떠나온 ‘계급 탈주자’들의 서사에는 냉철한 지적 분석과 수치심, 죄책감이 뒤엉킨 특유의 내적 분열이 존재한다. 그들은 지배 계급의 언어를 획득해 출신 계급의 모순을 서술하지만, 그 언어를 얻기 위해 가족을 등졌다는 부채감을 짊어진다. 에리봉은 노년을 비가시화하는 시스템을 비판하면서도 어머니를 요양원에 밀어 넣은 장본인이 자신이라는 죄책감을 숨기지 않는다. 고발의 분노와 배반의 수치심이 맞물려 있기에 그의 글은 단순한 사회 규탄문이나 감상적 참회록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기록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에리봉은 시스템의 부조리를 꿰뚫는 ‘비판자’, 어머니를 시설에 맡긴 무력한 ‘당사자’, 한 여성의 생애를 복원하는 ‘기록자’의 자리에서 말한다. 그러므로 독자는 그의 렌즈로 세계의 구조를 직시하고, 그의 고백 앞에서 공모자가 되며, 그 기록을 온전한 증언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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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목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거대한 벽에 가로막힌다. 시설의 비인간성을 아무리 규탄하고 자식으로서 자책해도 현실에는 뾰족한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이 무력감의 막다른 골목에서 에리봉은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왜 우리는 타인의 돌봄 없이는 살 수 없는 신체가 되었을 때 이토록 철저히 존엄을 잃는가.
그의 질문은 서양 철학의 빈칸을 겨눈다. 서양 철학에서 인간이란 언제나 미래를 위해 자신을 기획하고 선택하는 주체였다. 자유와 이성, 해방의 사유는 모두 선택할 수 있는 미래를 전제할 때만 성립한다. 하지만 요양원의 노년에게는 기획할 미래도 대안도 없다. 오직 죽음을 향해 닫혀가는 시간만이 남았을 뿐이다. 노년은 사회적 시스템뿐 아니라 철학적 사유 바깥으로도 밀려나 있다.
에리봉은 시몬 드 보부아르의 ‘노년’을 경유해 핵심을 짚는다. 여성, 흑인, 노동자는 ‘우리’라는 복수의 주어로 발언할 수 있지만, 쇠약한 고령자들은 결코 ‘우리’라고 말하지 못한다. 그러니 노년은 집단적 발언권을 박탈당한 ‘말할 수 없는 계급’이라는 것이다. 에리봉이 천착하는 문제가 바로 이 발언권의 박탈이다. 모든 비판 이론의 중심에는 “누가 발언할 수 있는가?”라는 정치적 질문이 놓여 있다. 자신을 대변할 수 없는 이들에게 목소리를 되돌려주는 일이야말로 작가가 말하는 글쓰기의 책무다. 제도가 한 사람을 ‘관리 대상’이라는 납작한 범주로 치워버릴 때, 문학적 기록은 그가 훨씬 더 크고 복잡한 존재였음을 복원해내야 한다. 에리봉은 어머니의 모순적 삶을 기록함으로써 사회가 지워버린 개인의 역사와 크기를 되돌려놓는다.
누가 발언하는가. 적어도 이 책에서만큼은 목소리의 주인이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은 이것이다. 누가 응답하는가. 그 답은 노년이 자신과 무관하다고 믿는 이들조차 피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몫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나 역시 벽에 갇히기 전까지는 노년을 삶에서 애써 떼어놓은 채 살아가리라는 것을. 이 책의 제목처럼 삶으로부터 노년과 죽음을 분리하려 애쓰다가, 어느 날 불현듯 노인이 되리라는 것을. 그때 나는 말할 수 있겠는가. 누가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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