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기 암이면 ‘확률’ 앞에서 모든 가능성을 지워야 할까 [.txt]

광고
김희경의 에이징북
나이가 들면서 크게 바뀐 생각 중 하나는 세상에는 이유를 알 수 없이 벌어지는 일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나를 포함해 주변을 둘러보면 중년기 즈음부터 예상치 못한 위기를 겪는 빈도가 늘어난다. 갑자기 암 진단을 받는다거나 가족의 돌연한 죽음을 겪는다거나 실직, 파산 등 불운이 불쑥 찾아오곤 한다.
갑작스러운 위기를 맞을 때 사람이 본능적으로 떠올리는 질문은 ‘왜?’다. 도대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모든 일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믿는 현대사회의 신념이 개인에게 끼치는 영향은 막강해서, 우리는 불운의 이유를 필사적으로 찾는다. 몹쓸 병이 찾아온 건 스트레스 탓, 배우자가 속을 썩인 탓, 가족력 탓, 건강 관리를 게을리한 탓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아무리 철저하게 건강을 관리해도 병에 걸릴 수 있고 유전적 소인이 끼치는 영향도 절대적이지 않다. 대다수 이유는 추정일 뿐이지만 우리는 어떻게든 원인을 찾아내 그것 때문이라고 믿는다.
광고
아무리 노력해도 이유를 알 수 없을 때 좌절감은 배로 커진다. 건강했던 내 아버지는 갑자기 걸린 뇌수막염 후유증으로 뇌병변 장애를 갖게 됐는데, 왜 그 병에 걸렸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온갖 자료를 찾고 의료진에게 질문해도 답은 추정의 범위를 넘어서지 못했다. 이 ‘알지 못함’이 내 무능의 증거이자 아버지에 대한 배반 같아서 오래 괴로웠다. 이제는 그저 운이 나빴다고 생각하려 애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라는 질문을 ‘왜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가’로 바꾸어 겨우 무지의 절망을 달랠 뿐이다.
광고
광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일이 들이닥칠 때 사람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일본 학자 미야노 마키코와 이소노 마호가 같이 쓴 책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은 한권 전체가 이 질문에 대한 두 사람의 답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말기 암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철학자 미야노가 의료인류학자인 이소노와 주고받은 편지글 모음이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이 책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 ‘올 오브 어 서든’의 두 주연배우는 올해 칸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공동 수상했다.
광고
우연과 질병, 의료, 선택, 죽음 등을 다루는 두 사람의 대화는 에두르는 법 없이 핵심으로 직진한다.
미야노가 갑자기 병세가 악화할지도 모른다는 진단에 예정된 강연을 취소해야 하나 망설이자 이소노는 “‘일어날지도 모르는 확률’이란 약한 운명론이 아닐까?”라고 질문한다. 확률에는 강력한 힘이 있지만, 그 숫자 앞에서 미래의 가능성을 봉쇄하고 개인의 삶에서 일어날 수 있는 소소한 변화를 다 지워버려도 될까. 이소노는 강연을 취소하지 말고 상태가 나빠지면 독감 핑계를 대라고 제안하며 이렇게 말한다.
“저 역시 다음달에 갑자기 무슨 일을 겪을지 모릅니다. 단순히 병을 진단받지 않았을 뿐.”
미야노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강연을 잘 마쳤고 몇번의 행사를 더 열었는데, 이 대목에서 나는 살짝 부끄러워졌다. 내가 그 고민을 들은 상대였다면 “아이고, 지금 강연이 뭐가 중요해요. 힘든 일 다 취소하고 치료에 집중합시다”라고 답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게 그를 위하는 길이라고 여겼겠지만, 실은 시시각각 변하는 인생의 가능성을 다 지우고 그를 말기 암 환자라는 고정된 ‘점’으로 바라보는 태도가 아닐까.
광고
미야노는 이소노의 말을 받아 불운은 ‘점’, 불행은 ‘선’이라는 생각으로 나아간다. 불운은 하나의 사건으로 ‘점’이지만 이 ‘점’에 자신의 인생을 고정하는 순간, 불행이라는 ‘선’이 시작된다. 그는 자신이 암에 걸린 것은 불운이지만, 불행하지 않다고 말한다. “암을 앓는 것이 나라는 인간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스스로 인생을 놓아버리지 않고 그 불운에서 어떻게든 인생을 되찾으려 안간힘을 쓴다.
미야노가 불운에서 인생을 되찾는 방법은 고통 속에서도 끊임없이 글을 쓴 것이었다. 평생 ‘우연’을 연구해 온 그가 자신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 질병을 앓는 삶의 불확실성을 탐구하는 글을 쓴 덕분에 불운을 불행이 아닌 다른 ‘선’으로 이어낸 이 책이 탄생했다.
우연은 아무것도 정해져 있지 않고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의 다른 이름이다. 사람은 누구나 우연에 휘말리며 무언가를 선택한다. 선택은 외길로 접어드는 게 아니라 그 길로 들어서는 순간 새롭게 생겨나는 수많은 가능성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선택하는 순간의 ‘나’는 확정되어 있지 않다. 선택함으로써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연을 받아들일 때야말로 ‘나’라고 부를 만한 존재가 만들어진다.
미야노가 쓴 마지막 편지에는 “우연을 통해 타자와 함께하는 ‘시작’으로 가득한 세계를 사랑한다”는 고백, “어쩌면 이 세계는 이토록 경이로운가” 하는 감탄이 담겨 있다. 그는 이 책 서문을 쓴 직후 의식을 잃었고 보름 뒤 생을 마감했다.
이소노가 계속 상대에게 집중하면서 대화하는 태도도 인상적이었다. 그는 상대를 말기 암 환자라는 ‘점’으로 바라보지 않고 존중하는 연구자이자 사랑하는 친구로 대하며 함께 아름다운 궤적을 그렸다.
내 아버지도 ‘점’에 그치는 존재가 아니다. 와병이 길어질수록 아버지는 환자로 먼저 불리지만, 기억을 잃었어도 그를 그답게 만드는 습관과 기질, 취향은 여전히 그의 것이다. 나는 거기에 주목하고 싶다. 어떤 상황에서든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개별성은 지켜봐 주는 사람과 함께 완성되기 때문이다.
KioskNews shows a cleaned-up reading view extracted from the publisher’s page — the original always lives on their site, not ou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