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도소 습격 사건’이라 불린 공수부대의 민간인 학살극 [오월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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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길은 1980년 5월 광주항쟁의 흔적을 따라 걷는 66.2㎞의 길이다. 횃불, 희생, 광장, 열정, 영혼, 그리고 최근 추가된 ‘한강 작가 소년의 길’까지 6개 코스다. 길을 따라 주요 현장에 사적비를 세워 친절히 안내하고 있다. 광주광역시가 만든 스마트투어 앱 ‘5·18 민주화운동’을 따라 걸으면 편리하다. 5·18기념재단 홈페이지에도 오월길 안내 코너가 따로 있다. 광주에서 태어나 고교 시절 광주를 겪은 백기철 전 한겨레 기자가 오월길 이야기를 10여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오월길 6개 코스 중 마지막 코스인 영혼 코스는 오월 영령이 잠들어 있는 5·18묘역으로 가는 길이다. 전남대에서 시작해 옛 광주교도소를 거쳐 망월동 국립5·18민주묘지까지 12.5km 거리다. 대중교통과 도보를 적절히 섞어 이동했다. 시내 구간인 전남대∼무등도서관∼옛 광주교도소는 도보로 이동했다. 옛 광주교도소에서 망월동 5·18묘역까지는 시외의 대로변이어서 518번 버스를 탔다.
518번 버스는 번호가 말해주듯 5·18민중항쟁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노선버스다. 효령노인복지타운에서 상무지구까지 운행한다. 광주 시내 5·18 사적지 30곳 중 14곳을 잇는다. 국립5·18민주묘지, 전남대, 광주역, 옛 도청 일대, 금남로, 상무대 옛터 등 주요 사적지를 거친다. 오월길 시내 구간은 볼거리, 먹거리가 많아 도보로 이동하면 좋지만 시외 구간은 적절히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편리하다. 광주지하철 1호선이 상무지구와 금남로, 옛 도청 일대를 지하로 연결한다면 518번 버스는 지상에서 항쟁의 흔적들을 따라 달린다. 30여분의 성긴 운행 간격이 다소 흠이지만, 518번 버스에 몸을 싣고 떠나는 ‘5·18 시티투어’도 해 봄 직하다.
영혼 코스 시작점인 전남대 정문은 옛 도청으로 이어지는 횃불 코스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영혼 코스 두 번째, 세 번째 사적지인 무등도서관, 옛 광주교도소까지 이어지는 길은 제법 활기차다. 대학가와 전통시장, 대형마트 등이 있다. 무등도서관은 동문대로변 근린공원에 자리해 고즈넉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무등도서관 사거리는 항쟁 당시 옛 광주교도소에 주둔한 계엄군이 야산 자락을 따라 차단선을 치면서 무고한 시민들이 총탄에 희생된 곳이다. 지금의 널찍한 사거리에서 항쟁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다. 무등도서관은 항쟁 이후인 1981년 개관한 탓인지 5·18 사적비도 세워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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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복 3차선의 동문대로를 따라 15분쯤 걸으면 왼편으로 옛 광주교도소가 나온다. 고층 아파트 단지와 골프연습장 등에 둘러싸여 있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대로변 석재상 앞에 5·18 사적비가 덩그러니 세워져 있다. 옛 교도소로 들어가는 좁은 길목은 연두색 철제 울타리를 쳐서 일반인의 출입을 막고 있다. 저만치 예전 교도소 입구가 그대로 남아 있다. 굳게 닫힌 정문 위로 ‘국민행복 희망교정’이라는 예전 구호가 있다. 왼편 아파트 단지와 교도소 사이로 난 길을 따라가 보니 좁은 입구와는 달리 상당히 큰 규모의 부지와 시설이 길게 뻗어 있다. 철망과 나무 수풀에 가려 교도소 안쪽은 볼 수 없다. 큰 나무들 사이로 예전의 감시탑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광주교도소는 2015년 이곳 문흥동에서 현재의 삼각동으로 이전했다. 이곳은 5·18민중항쟁 사적 22호로, 감시탑, 수용동 등 일부 시설이 보존돼 있다. 민주인권기념파크 조성이 추진되고 있다고 한다.
항쟁 당시 광주교도소에는 5월17일 계엄령 확대와 함께 제31사단 병력이 경비에 나섰다. 이 지역은 담양, 곡성, 여수, 순천 등으로 가는 광주의 북쪽 관문에 해당한다. 5월21일 계엄군이 시내에서 빠져나와 외곽으로 철수하면서 전남대에 주둔했던 제3공수여단이 광주교도소로 이동했다. 제3공수는 5월24일 오전까지 이곳에 머물며 외곽봉쇄 작전을 벌이다 도청 재진입을 위해 송정리 광주공항으로 이동했다. 광주교도소 일대에서의 민간인 희생은 대부분 제3공수가 주둔하던 시기에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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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직후 신군부는 옛 광주교도소 일대에서의 민간인 희생을 이른바 ‘교도소 습격 사건’으로 명명했다. 5·18이 불순분자의 폭동이라는 주장의 근거로 삼으려 한 것이다. 항쟁 직후 보안사는 5·18 관련자들을 수사한 뒤 광주교도소에 사상범으로 복역 중이던 유낙진을 구출하기 위해 동생 유영선이 군중을 선동해 교도소를 습격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항쟁 27년 뒤인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 조사 결과 이는 보안사의 터무니없는 조작으로 밝혀졌다. 유영선은 계엄군의 무차별 진압에 격분해 시위대에 합류했다가 5월21일 오후 1시께 도청 앞 집단발포 때 머리에 관통상을 입고 기독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곧바로 숨졌다. 그런데 광주교도소에 시민들이 접근하자 총격이 시작된 것은 21일 오후 5시께 3공수여단이 주둔하면서부터였다. 유영선이 총을 맞고 병원으로 옮겨진 뒤의 일이다. 보안사는 총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던 유영선이 형 유낙진을 구하려고 교도소 습격을 기도한 것처럼 날조한 것이다.

전두환은 2017년 회고록에서 ‘교도소 습격설’을 비중 있게 다뤘다. 시위대가 북한 지령을 받고 6차례에 걸쳐 집요하게 교도소를 습격했고, 이는 미전향장기수, 간첩, 강력범을 해방시켜 폭동을 일으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적었다. 5·18 단체들은 곧바로 전두환을 고발했고 법원은 2021년 명백한 허위 사실로 판결하고 회고록의 해당 부분을 영구히 출판금지 처분했다. 재판부는 당시 시위대 인원이나 무장의 정도는 보잘것없는 수준이었고 교도소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인근 거점을 방비하던 3공수여단의 일부 병력과 교전이 이뤄진 것이라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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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은 한술 더 떠 ‘북한군 600명 교도소 공격설’을 주장했다. 2014년 ‘5·18분석 최종보고서’에서 5·18 자체가 북한군이 일으킨 폭동이고, 북한군 600명이 좌익수를 해방시켜 폭동의 불씨를 이어가기 위해 광주교도소를 6차례 공격했다고 한 것이다. 지만원의 터무니 없는 주장은 군과 검찰, 국정원 등 모든 국가기관의 5·18 관련 자료에서 아무런 근거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5·18조사위 2024년 보고서는 항쟁 기간 ‘고정간첩망에 광주교도소를 습격하여 해방시키라는 지령이 내려졌다’는 정보가 관련 부대의 각종 기록은 물론 505보안대가 보안사령부에 보고한 내부 자료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적었다. 지만원의 허무맹랑한 주장에 대한 단죄는 9년 뒤인 2023년에야 이뤄졌다. 지만원은 재판 중에도 허위 사실을 계속 유포해 추가 기소됐다. 대법원은 2023년 최종심에서 명예훼손 등으로 징역 2년 실형을 선고했고, 지만원은 2년 만기 복역한 뒤 2025년 출소했다.
5·18조사위는 2024년 보고서에서 광주교도소 인근에서 무장 시위대와 제3공수여단 간에 두 차례 교전이 있었다고 본 1997년 대법원 판결을 적어놓았다. 제3공수 전투상보가 20회 이상의 민간인 피해 사건 중 무장 시위대가 교도소에 접근해 발포했다고 적시한 것은 모두 5회였다. 대법원은 이 가운데 2차(5월22일 밤 0시40분)와 3차(5월22일 오전 9시)를 무장 시위대와의 교전으로 봤다. 대법원은 간첩을 포함한 재소자 약 2700명이 수용된 주요 국가보안시설인 광주교도소에 무장 시위대가 접근해 계엄군을 공격하는 행위는 불법적인 공격 행위로 판단했다고 5·18조사위 보고서는 적고 있다. 보고서의 이런 서술 방식은 5·18 단체와 학계 등으로부터 강한 반발을 샀다. “조직적 교도소 습격 사실이 없다”고 판단한 전두환 회고록 민사 재판부 판결보다 더 후퇴한 것이고, 조사위가 군의 전투상보 기록에 휘둘려 진상을 명확히 파헤치지 못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최용주는 1997년 대법원 판결과 관련해 광주교도소 사건은 시 외곽으로 진출하려는 시위대와 이를 저지하려는 계엄군 사이에 벌어진 우발적 충돌이라고 봤다. 교도소라는 국가중요시설을 탈취할 불순한 목적을 가진 무장 시위대와 이를 방어하려는 계엄군 사이의 교전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러 군 자료를 보면 시위대가 군사적 의미에서 교도소를 습격할 목적으로 사격했다고 할 만한 근거는 거의 없다. 2차 교전으로 규정된 5월21일 자정 무렵 상황은 무장 시위대가 고속도로를 따라 교도소에 사격을 가하면서 접근했다고 기록돼 있는데 교도소를 습격할 의도가 있었다면 국도 쪽으로 접근해야지 왜 고속도로 상에 있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시위대 차량이 교도소가 아니라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동선에 있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이때 살아남은 생존자는 당시 교도소 습격이 아니라 창평에 있는 예비군 훈련장의 무기를 습득하기 위해 고속도로에 진입했다고 증언했다. 제3공수와 시위대 간에 산발적인 교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무장 시위대가 교도소를 습격할 합리적인 동기가 있었는지 면밀히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1995년 검찰 수사결과 보고서를 보면 5월21일 오후 5시께 3공수가 광주교도소로 옮겨와 외곽을 차단하기 이전까지는 시위대와 계엄군의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향토사단인 31사단 병력이 지키던 광주교도소 인근에는 버스와 트럭 등에 탄 시위대가 오전 9시께부터 오후 3시40분까지 모두 네 차례 나타났지만 주변을 선회하거나 이동해 가면서 계엄군과 직접적 충돌은 없었다. 3공수가 들어와 외곽을 차단하고 교도소 인근 곳곳에 매복하면서부터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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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공수는 교도소 도착 즉시 담양, 곡성 방면으로 가는 고속도로와 국도 입구를 차단하고 시위 차량은 물론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 차량까지 총격을 가했다. 5월21일 오후 7시20분께 담양군 대덕면 한 마을 주민 4명이 광주에서 일을 보고 돌아오는 도중 교도소 뒤 고속도로에서 계엄군의 집중사격을 받고 2명이 죽고 2명이 부상했다. 마을 이장이자 새마을 지도자인 고규석(39)과 축산업을 하는 임은택(35)이 총탄에 희생됐다. 부상자는 박만천(21), 이승율(40)이었다. 고규석은 자동차 매매로, 임은택은 소값을 받으러, 이승율은 벽지를 사기 위해, 박만천은 나들이 삼아 광주에 나갔다가 고규석이 운전하는 픽업트럭을 타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이들은 광주-담양간 고속도로를 지나던 중 교도소 입구 부근에 도로를 막는 바리케이드가 있어서 이것을 치우고 오는데 갑자기 총격을 받았다. 고규석, 임은택은 운전석과 조수석에서 숨져 있었고, 공수부대에 사로잡힌 생존자 두 명은 차량에 총이 없는 것을 확인한 지휘관에 의해 풀려났다.
5월22일 오전 10시께 화물 운송일을 하던 김성수(46)는 아내 김춘화(43)와 막내딸 김내향(5)을 자신의 트럭에 태우고 다른 가족이 있던 진도로 향했다. 광주교도소 부근에서 검문에 걸려 돌아가던 중 뒤에서 총격을 받아 일가족이 총상을 입었다. 총상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잃지 않은 김성수는 장교에게 항의하자 손을 저으며 가라고 하는 데 그쳤다. 총상을 입은 김씨는 광주 시내로 차를 몰고 오다가 정신을 잃었고 깨어보니 전남대병원이었다. 아내는 뇌수술을 세 번이나 받는 등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막내딸은 하반신이 마비된 중증장애인이 됐다. 광주 산수동에서 자취하던 재수생 김병연(18)은 5월22일 오후 2시20분께 친구 두 명과 함께 담양군 금성면 외추리 집으로 걸어서 귀가하던 중 두암동 학산실업학교 건너편 보리밭에서 제3공수의 총격으로 가슴에 관통상을 입고 숨졌다.
5월22일 0시40분께 엿 행상을 하던 서종덕(18)은 고속버스에 탑승했다가 광주-담양 간 고속도로에서 총탄에 숨졌다. 제3공수 전투상보에 2차 교전으로 적힌 상황이다. 3공수 12대대 7지역대 9중대장 김홍건은 검찰 조사에서 “21일 23시가 지나서 야간에 고속도도 쪽 도로를 통해 시위대들이 여러 대의 차량에 타고 와서 집중사격을 했으며, 여단에서도 그 방향으로 있던 병사들이 한꺼번에 응사했다”고 진술했다. 5월22일 오전 9시께 2.5톤 트럭을 타고 가던 이명진(37), 이용충(26)이 광주교도소 앞 국도변에서 제3공수의 총격을 받고 숨졌다. 함께 트럭에 탔던 3명은 도피했고, 시신 2구는 정문 앞 묘지 옆 언덕에 가매장했다. 이른바 3차 교전으로 적힌 상황이다.
5월22일 오후 2시께 상황에 대해서는 당시 대동고 3학년이었던 한광희의 증언이 있다. 한광희는 시위대 차 안에서 주먹밥으로 점심을 먹은 뒤 담양, 곡성 등 광주 북부 지역으로 이동 중이었다. 모두 5대의 버스와 트럭에 타고 있었다. 시내를 이리저리 돌다 전남 북부 지역으로 가서 광주 참상을 알리자는 의견에 동조한 시위대 차량이 모였다. 한광희는 차량 행렬 세 번째 차, 2.5톤 트럭 짐칸에 탑승했다. 20여명이 함께 타고 있었다. 대부분 총을 가지고 있었고 다른 차들도 M1과 카빈 소총을 가지고 있었다. 서방사거리를 거쳐 동신고 앞을 지나 고속도로 진입로가 있는 지금의 각화동 사거리를 지날 때 갑자기 차가 멈추고 요란한 총소리가 들렸다. 계엄군들이 교도소 입구 바리케이드에서 차량 행렬에 총격을 가한 것이다. 맨 앞 버스는 앞 유리창이 깨지고 차 안은 아비규환이 됐다. 2.5톤 트럭에 탔던 이들은 짐칸 바닥에 납작 엎드려 총격을 피했다. 차량 행렬은 황급히 핸들을 꺾어 시내 방향으로 질주했다. 대부분 소총을 가지고 있었지만 갑작스러운 계엄군 총격에 놀라 어찌할 줄 모르고 몸을 피할 뿐 대응 사격을 하지 못했다.

5·18조사위 보고서는 제3공수여단이 전남대에서 퇴각하면서 시민 수십명을 2대의 차량에 나눠 싣고 광주교도소로 연행했다고 적었다. 이때 밀폐된 차량에 최루탄을 넣어 2명이 질식사했다. 교도소 도착 후에도 연행한 민간인을 대검으로 머리를 가격해 숨지게 했다.
5·18조사위 보고서는 5월21일부터 23일까지 광주교도소 인근에서 희생된 민간인을 모두 12명으로 적고 있다. 암매장된 이들까지 치면 최대 28명이 희생됐다는 추정이 있다. 5·18조사위는 당시 암매장을 실행했던 군 관계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지표조사 및 유해발굴 조사를 여러 차례 실시했지만 대부분의 장소에서 5·18과 연관된 유해는 발굴되지 않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건물이나 지형 자체가 변해 암매장 장소를 특정하기가 쉽지 않은 탓이다. 5·18조사위는 행방불명으로 인정된 73명의 소재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는 만큼 암매장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적고 있다.
제3공수가 광주교도소 일대에 주둔하는 동안 시민군 공격으로 희생된 제3공수 병력은 한 명도 없었다. 5월21일 오후 5시께 제3공수가 광주교도소로 이동해 31사단과 임무교대를 하던 중 병사 한 명이 시민군의 기습 총격을 받아 팔에 관통상을 입은 것 이외에는 공식 사상자 기록이 없다. 주남마을, 송암동 등 다른 외곽봉쇄 작전에서도 계엄군 간 오인교전으로 인한 희생이 있었을 뿐 시민군의 공격으로 희생된 공수부대원은 없었다. 공수부대의 외곽봉쇄 작전이 시작된 5월21일 계엄사령관은 자위권 보유를 천명하고 이를 담은 ‘계엄훈령 제11호’를 하달했다. 이때부터 시민들에 대한 계엄군의 살상 행위가 공공연하고 광범위하게 발생했다. 그전까지는 급박한 상황이 아니면 발포를 억제하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자위권 발동 이후 시민에 대한 무차별 사격과 사전 경고 없는 발포 등 살상 행위가 공공연하게 자행됐다.
광주교도소 일대의 공수부대 외곽봉쇄 작전은 마치 그물을 쳐놓고 달려드는 이들을 도륙하는 학살극과 같았다. 이는 주남마을, 송암동 등 공수부대의 다른 외곽봉쇄 작전도 마찬가지다. 교도소 인근 도로를 차단한 상태에서 일부 충돌이 빚어진 시위대 차량을 압도적 병력과 화력으로 공격한 ‘매복 학살’에 가까웠다. 항쟁의 외부 확산을 막기 위해 바리케이드로 접근하는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로 총질을 해댄 것이다. 46년 전 일이지만 국민 생명을 파리 목숨처럼 가벼이 여긴 천인공노할 만행이다. 결국 ‘교도소 습격 사건’이 아니라 ‘광주교도소 민간인 학살 사건’이었다.
흉가처럼 버려진 지금의 광주교도소에서 살벌했던 항쟁 당시를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무성한 잡초와 나무 수풀만이 세월의 흔적을 말해줄 뿐이다. 함께 차를 타고 친척 집에 가기 위해 고속도로를 지나다 무차별 총격을 받은 일가족, 친구들과 함께 밭길을 걸어 담양 집으로 귀가하다 변을 당한 재수생, 시민군 차량에 탑승해 외곽으로 진출하려다 계엄군 총탄에 희생된 이들까지 누구 하나 억울하지 않은 죽음이 없다. 어쩌면 아직 주검조차 발견되지 못하고 구천을 헤매는 행방불명자의 혼령도 이곳 광주교도소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옛 광주교도소 입구 근처에는 올망졸망한 식당들이 몇 개 있다. 건너편은 대형 농산물시장이 들어서 있다. 식당 한 곳을 찾아 들어가 백반 정식을 시켰다. 점심때가 조금 지났는데도 제법 붐빈다. 시내 외곽의 허름한 백반집이어서 별반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생선구이와 정갈한 나물 반찬, 깔끔한 미역국이 일품이다. 오월길을 걷는 동안 먹었던 백반 중 두세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식당을 나와 길을 건너 518번 버스를 탔다. 망월동 5·18묘지 가는 길이었다.

글·사진 백기철 조선대 자유전공학부 객원교수 kckc100@naver.com
(참고문헌)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종합보고서(2024)
황석영 이재의 전용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창비, 2017)
안종철, ‘5·18때 북한군이 광주에 왔다고?’(아시아문화커뮤니티, 2016)
광주서석고 제5회 동창회, ‘5·18, 우리들의 이야기’(심미안, 2019)
최용주, ‘광주교도소 습격(?), ’광주교도소 습격사건‘의 진실’(주먹밥 제53호, 2019.1.)
김용희, ‘옛 광주교도소 습격사건의 진실’(광주일보, 2018.7.4.)
최기훈, ‘5·18 광주, 교도소 습격은 없었다’(뉴스타파, 2019.4.4.)
광주통합시 스마트투어 앱 ‘5·18민주화운동’
5·18기념재단 홈페이지 https://518.org/base/main/view
글쓴이 백기철은 광주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1980년 광주항쟁 때 고교 2년생으로 광주를 겪었습니다. 2023년까지 서울에서 ‘한겨레’ 기자로 33년간 일했습니다. 최근 2년여 동안 매주 광주를 찾을 일이 생겨 틈틈이 오월길을 걸었습니다. 그 사이 한강 작가는 ‘소년이 온다’로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한강 작가의 작품을 따라 걷는 오월길은 더욱 애잔하면서도 명징했습니다. 오월길에서 접한 광주의 어제와 오늘 이야기를 담아 독자들과 만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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