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반도’와 일본 사이에서 삶과 앎을 접합하는 번역자”···[만나듣다]⑩재한 자이니치 학자 조경희
부모에게 늘 “너는 조선사람이다”라는 소리를 듣고 자랐던 조경희가 칸코쿠(한국)란 말을 처음 들은 건 일본 유치원을 다닐 때다. “커서 무엇이 되고 싶어요?”라는 교사 질문에 조경희가 우물쭈물했다. 집에선 부모와 장래 희망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친구가 “꾱히(경희)짱은 칸코쿠진(한국사람)이니까 한국의 선생님이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여기서는 초센(조선)이라고 하면 안 되겠구나” 하는 느낌을 받은 어린 조경희 입에선 “그래요, 나는 칸코쿠의 선생님이 될래요”라는 말이 나왔다.
커가면서 겪게 될 많은 경계 중에서 한국과 북한, 일본이라는 국적과 국경의 경계를 어렴풋이나마 처음 느낀 순간이다. “일본에 있으면서 한국으로 호명”된 첫 경험이기도 하다.
조경희 성공회대 교수는 ‘재한 자이니치’다. 그는 ‘재한재일(在韓在日)’이라는 형용모순의 이 호칭이 남북한과 일본에 걸친 디아스포라들의 이동의 궤적, 경로의 흔적을 드러낸다고 본다. 그는 이 중첩의 공간에서 ‘삶과 앎’을 한데 붙여나가고, 평화와 공존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번역자가 되려 한다. 지난달 19일 경향신문사에서 촬영에 응하고 있다. 김종목 기자
조경희(성공회대 교수)는 <낯선 집>(사계절)에서 지리적 국경선을 넘어 ‘우리’와 타자, 정상과 예외를 가르는 경계에 관한 문제를 들여다본다. 그 관찰과 경험의 결론 하나는 “경계는 누군가를 바깥으로 밀어내면서 유지된다”이다. “누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인정되는가, 누가 안전을 보장받을 자격이 있는가, 누가 끝끝내 바깥에 남겨지는가. 경계에 관한 담론이 넘쳐나는 오늘에도, 경계선의 실제적 작동과 그 경계 위 낯선 집에서 함께 살아가는 삶의 의미를 묻는 일은 여전히 절실하다”고 책에 썼다.
남북일에 걸친 재인 조선인으로서의 경험
“역사와 경계에 관한 문제의식”으로 이끌어
한국 정착 25년 , 한국 국적 취득에도 ‘낯섦’ 여전
책의 식민주의, 디아스포라, 재일조선인, 분단, 이주, 혐오, 페미니즘 같은 주제들은 “역사와 경계에 관한 공통된 문제의식”과 이어진다. “역사와 체제가 만들어낸 경계의 균열을 자신의 삶 속에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이야기한다.
지난달 19일 경향신문사에서 만나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들었다. 도쿄에서 차로 2시간가량 걸리는 도치기현 남서부 소도시 아시카가시에서 태어나 자랐다. 중학교까지 이곳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계 조선학교에 다녔다.
친가는 경북 경주, 외가는 제주에서 왔다. “할아버지는 1920년대 노동 이민으로 일본으로 왔다고 들었어요. 할아버지가 작은 파친코 가게를 시작했고, 아버지가 이어받았어요 당시 재일동포 사회에서 자영업으로 주로 파친코와 야키니쿠를 했죠.” 건물 1층은 파친코 가게, 2층은 마작 가게와 술집, 3층은 집이었다. “대낮부터 어른들이 노는 모습을 많이 봤어요. 겉으로는 거칠어 보이지만 속으론 정 많은 종업원 아저씨들과 밥을 먹기도 하고요. 나에게는 당연한 세계였어요.”
유치원 졸업 뒤에 ‘한국’ 당시 ‘남조선’에 관해 또 알게 됐다. “어떤 날엔 우리 집 마작 가게가 지역 동포들이 모이는 집회장이 되곤 했어요. 초등학생 때 5·18 광주민주화운동 영상을 마작 가게에서, 또 학교에서 봤어요. 군인들에게 잡혀가는 광주시민들 모습에 눈물이 나왔죠. 학교에선 ‘남녘땅 민주화를 위해 함께 싸워야 한다’고 배웠어요.” 이때 본 광주항쟁의 모습이 그에겐 ‘남조선’의 ‘원풍경(原風景)’이 됐다. 그는 “영상물이나 교육 내용에 정치선전 요소가 있었다 하더라도, 남쪽 현실을 ‘우리’ 문제로 생각하려고 했던 그 경험들은 나에게 올바른 영향을 줬다”고 했다.
전교생이 120명 남짓한 아담한 학교였다. 초등학생과 중학생이 어울려 놀곤 했다. “살벌한 일본 사회에서 소수자인 재일조선인 아이들에게 정서적인 안정을 준 것 같다. 나에게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나 애정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조선학교에서 배양된 것”이라고 했다.
조선학교는 “폐쇄적이며 보수적”인 공간이기도 했다. “학교에서는 우리가 ‘단결’할 필요성을 가르쳐줬지만, 바깥세상을 살아갈 지혜는 그다지 가르쳐주지 않았죠.”
졸업 뒤 일본 대학으로 진학했다. “자연스럽게 국적, 민족, 정체성 같은 문제들을 대면하기 시작했어요. 냉전 붕괴와 글로벌화가 진행되던 때죠. 국민국가를 넘어서려는 기류도 있었고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사회학 공부를 시작했죠.” 그는 재일 학생단체에서 활동하며 ‘재일사회 미래’ 같은 주제도 고민했다고 한다. “(재일 학생단체는) 굉장히 본국(북한)중심적이고, 남성중심적인 사고 틀에 갇혀 있었어요. 자신감을 가지려면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다른 대학으로 편입했다. 면접 때 교수가 ‘왜 사회학을 하고 싶냐’고 물었다. “막연히 ‘인권 문제를 하고 싶어서’라고 답했어요. 그 교수가 ‘자신의 문제를 하고 싶어 하는 거냐’고 물어서 ‘그렇다’고 했어요.” 그는 “자이니치(在日·재일)가 아니었으면 더 재미있는 일을 하지 않았을까”라며 웃었다. “그만큼 자이니치로 산다는 게 제 삶의 방향에 큰 영향을 준 거죠.”
당시 조경희에게 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었다. 1994년 대학생 방문단 일원으로 북한을 방문했다. “매일 차려지는 진수성찬에, 인민들의 째려보는 듯한 시선”에 “풍요로운 나라에서 온 손님”이란 걸 느꼈다. “조국과 비대칭적인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됐어요.”
‘국민ㅇ’란 말로 모든 것 규범화하는 한국
다문화 사회서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말
이주민에게는 권력으로 느껴질 수 있어
1990년대 초반 미디어로 본 ‘남조선’의 모습은 과거에 알던 것과 많이 달랐다. 물질적 풍요와 ‘세계화’, 정치제도적인 민주화가 이뤄지는 모습을 봤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 조선적(朝鮮籍·일본에 거주하면서 대한민국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적을 갖지 않고, 일본에 귀화하지도 않은 이들이 갖는 행정상의 적) 동포들의 한국 입국 가능성이 커졌다. “처음으로 여행증명서를 발급받아 한국을 방문했어요. 그동안 가고 싶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상상 속의 조국’이었는데, 막상 와보니 너무 즐거웠어요.” “북한식, 일본식이 섞인 딱딱한 ‘우리말’”을 하며 열흘을 돌아다녔다.
2002년 5월엔 7개월짜리 여행증명서를 받았다. “한국 정부가 여전히 ‘조선적’자들을 ‘북한국적자’로 볼 때라 이례적인 장기체류 허가였죠.” 입국한 게 한·일 월드컵 시기였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과 길거리에서 하이터치를 하면서 한국 사회와의 ‘만남’에 들떴어요. 그 와중에도 ‘대~한민국!’이라는 응원만은 몸이 움츠려서 따라 할 수 없었어요. ‘남조선’으로 배워왔던 한국이 내 삶에서 상대적으로 먼 나라였던 것은 부정할 수 없었던 거죠. 그 과정을 지워버리지 않고, 거리감을 인내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한국에서 ‘해방감’을 느꼈다고 한다. 이곳에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한국 거주를 위해 ‘조선적’을 포기하고, ‘한국적’을 취득했다. 정체성 하나가 사라진 것일까. “한국, 일본, 북한 사이에서 지리적·제도적 이동을 했다고 해서, 정체성이 이동하는 건 아니에요. ‘전향의 논리’가 아니라 ‘이동의 경험’ 속에서 정체성이 축적된다고 봐야죠.”
한국에 사반세기 가까이 살면서 “어색한 ‘우리말’은 서울말에 가깝게 ‘교정’”됐다. “가족을 꾸리고 돈도 버는 생활인이 되고도 ‘낯선 한국’은 여전하다”고 했다. 한국에서든 일본에서든 “온전히 어딘가에 속하고 있지 않다”는 느낌도 변함이 없다. 조경희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노마드적인 삶은 환상”이라고 여기며 이렇게 말했다.
“어딘가에 조금씩 속하면서 삶을 이어가는 거죠. 자이니치들도 5세대, 6세대까지 계속 일본에서 정착한 거잖아요. 어딘가 낯설고, 불완전한 곳을 집으로 만들어왔어요.”
“자이니치들은 ‘38선’에 관한 감각도 다르다”고 했다. “일본에선 물리적인 38선이 없기 때문에 재일동포들은 국적이 다르거나 서로 반목하더라도 결국은 가족이거나 같이 술을 먹는 친구인 경우가 흔히 있어요. 민단이니 총련이니 하는 것도 그 경계를 넘나들 수밖에 없어요. 한국 사회나 정부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굉장히 의심스러운 존재가 되어버리는 거죠. 재일동포들이 과거 간첩단사건의 피해자가 된 것은 그 연루를 정부가 어떻게든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에요.”
할아버지의 고향으로 ‘귀환’하고도 낯선 땅에서 자신을 다시 적응하는 과정을 겪어야 했다. 그렇다고 한국이 외국도 아니었다.
“디아스포라는 늘 이 모호한 경계 사이에 있어요. 한쪽에 소속하고, 이탈하고, 또 소속과 이탈을 반복하죠.”
3개 국가 연루된 전쟁·안보·분단 현실 속
번역은 평화와 공존의 세계 만들어 가는 것
조경희에게 ‘디아스포라들의 집’은 “한쪽만을 택할 수 없는, 여러 곳에 연루된 삶”으로 이뤄진 곳이다. 삶의 여러 경계선을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원래 집이라는 곳이 편안하다라는 것도 환상 아닙니까? 집이 지옥인 사람들도 많고요. 돌봄을 하는 사람들한테는 집은 노동의 공간이죠. 굳이 디아스포라만의 문제는 아니지 않는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조경희는 세상을 경계에서 바라보는 듯했다. 이곳에서 관찰한 결론 하나는 “한국은 매우 동질 지향적인 사회”라는 점이다.
“민족주의라기보단 ‘대한민국주의’ ‘국민우선주의’가 앞서는 곳이죠. 국민이라는 말로 모든 것을 규범화하죠. ‘정상가족’이라는 말에 빗대 ‘정상국민’이라는 말로 개념화해보려고 해요.”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여러 계기 중 하나는 윤석열 탄핵 집회 때다. 그는 “다양한 주체들이 단상에서 발언하는 모습에 감명을 받으면서도 어딘가 불편한 감각을 느꼈다”고 했다.
치마저고리 교복을 입은 조경희 교수(가운데줄 맨 왼쪽)가 1991년 지바 세계 탁구선수권대회 경기장에서 단일팀을 응원하고 있다. 남북한이 사상 최초로 단일팀 ‘코리아’를 결성해 출전했다. 조 교수 제공
“제가 탄핵 촛불집회에 참여했을 때만 해도 성소수자, 청년, 지방의 공장노동자, 농민 등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어요. (2030 여성이 주체가 된) 남태령도 있었고요. 하지만 외국인이나 이주민들이 그 ‘민주시민’ ‘주권국민’ 틀 안에 포함되는 걸까요? 저한테는 이런 문제가 늘 의문이죠.”
헌법 제1조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문구도 “내란 국면을 거치면서 다시 신성화가 되는 것 같다”고 했다. “권력과의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이 조항이 큰 울림을 가지지만, 현재의 다문화적 사회에서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말은 수행적인 권력이 될 수 있어요.”
그는 “‘외국인도 포함시키자’는 단순한 온정주의를 뜻하는 건 아니다”라며 이렇게 말했다. “어떤 경계를 그으면 반드시 외부가 생기죠. 한국인이라 호명하면 경계의 권력이 발생하는데 한국 사회는 권력투쟁과 분단체제의 문제가 현재 진행형으로 있기 때문에 늘 ‘한국’이라는 주체를 당위로 세우는 것 같아요. 과거에는 ‘민중’ ‘시민’ 등 대안적인 호칭을 고민했다면 현재 다시 ‘국민’ ‘한국’이라고 거리낌없이 호명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고 해야 할까요.”
한국 사회의 ‘혈통주의’나 ‘민족주의’를 두고는 이렇게 말했다. “같은 혈통인데도, ‘재미동포-재일동포-조선족-고려인-탈북자’ 등으로 위계화됐죠. 또 그 밑에 외국인 이주민이 있고요. 미국이나 유럽에서 온 외국인들은 또 다른 위치에 있죠. 누군가 ‘GNP 민족주의’라는 말을 했던 것이 기억나는데, 결국은 국가의 경제력과 계급을 통한 위계화가 끊임없이 작동한다고 봅니다.”
‘K-’ 접두어를 붙인 말을 두고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을 주체화하고, 그것을 글로벌 상품으로 브랜딩하려는 규범과 욕망이 복잡하게 작동하는 것 같아요. ‘한국사람 다 됐네요’ 같은 칭찬도 좋은 맥락에서 하는 말이란 건 알지만, 본국이 메인이고 디아스포라들은 영원히 서브라는 담론 구조에선 디아스포라들의 실천은 본국에 얼마나 도움을 주는가라는 경제적 유용성과 애국 서사에 빨려들어가 버립니다.” 조경희는 “근현대 시기 해외로 나간 700만 동포들의 시선으로 한반도를 들여다보는 일이 필요하다고 본다”고 했다.
조경희 자신은 “경계의 정치와 그 경계를 살아내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기록하려 한다. 한 예가 재일 여성들의 위안부 운동이다. “재일 여성들은 주도적으로, 강력하게 위안부 운동을 해나갔어요. 가교가 아니라 독자적으로 운동을 이끌었죠. 이런 경험들을 조사하고, 알아가며, 기록하는 과정에서 저 자신을 다시 한번 자리매김합니다.”
조경희는 자신을 “한반도와 일본 사이에서 삶과 앎을 접합하는 번역자”로 규정한다. 국제회의 현장 같은 데선 번역과 통역을 부차적이고 부수적인 일이나 매개나 가교로 여기곤 한다. 그는 “이렇게 여기는 건 국민국가 등 공동체의 동질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일본 역사학자 사카이 나오키의 “번역이 주체를 만든다”는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했다. “번역 행위 자체가 한국이나 일본이라는 집합체를 형성하게 만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번역자는 연대를 통한 공동체 형성에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이니치는 한 국가에 온전히 소속되진 않았으나 남·북·일이라는 세 국가에 모두 걸친 생활 세계를 살아가곤 한다. 예를 들어 조경희는 일본에 살면서 남북한을 다 방문했다. ‘두 개의 조국’을 배워나갔다. “전쟁과 안보의 관점에선 이런 생활 세계에 사는 다중적인 소속감을 가진 이들을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볼 수밖에 없어요. 간첩, 스파이로 보는 거죠. 평화와 공존의 관점에서 이들은 번역자가 됩니다. 연대의 존재가 되는 거죠.” 그는 “전쟁과 안보, 분단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번역은 평화와 공존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삶과 앎을 접합하는 번역자”의 책무다.
조경희는 2001년 겨울 첫 한국 방문 때, 초등학교 때부터 조선학교에서 암송한 할아버지 고향을 찾으려 했다. ‘경상북도 경주군 내남면 이조리.’ 경주까지 내려가 택시를 탔다. 목적지에 가까워질 때 이어지는 풍경 속 ‘고향’은 충분히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어 차를 돌렸다. “나는 별안간 그곳에 꼭 도착해야 할 이유를 잃어버렸던 것 같다. 나의 고향 방문은 그렇게 미완으로 끝났다.” 그는 “그때는 ‘고향’이라는 상징물이 요구하는 그리움의 감각이 너무 관념적으로 느껴져서 몸이 따라가지 못했던 것 같다. 그때는 처음이라 낯섦이 너무 강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언젠가는 그곳에 가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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