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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August 30, 2026

통속 드라마를 품격 있게…안판석은 늘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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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3월5일 원효대교에서 드라마 ‘밀회’(JTBC)를 촬영 중인 안판석 감독(가운데)과 제작진. 장용우 감독 제공
2014년 3월5일 원효대교에서 드라마 ‘밀회’(JTBC)를 촬영 중인 안판석 감독(가운데)과 제작진. 장용우 감독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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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행을 전제로 시의성 있는 주제
골라 세련되게 다루는 솜씨 탁월
배우들 정말 존중하고 배려해
작가 원고마감 채근 않고 기다려

드라마 말고 골프나 등산 여행 등
그 어떤 취미 있단 이야기 못 들어

우리는 옥타비아누스가 등장하면서 벌어지는 극적 반전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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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가 암살당하고 급박하게 돌아가는 로마의 권력 투쟁은 다양한 캐릭터의 충돌과 권모, 술수가 난무하는 최고의 스릴러가 될 것이다. 이를 미니시리즈로 만든다면 1회 엔딩은 삼두체제에서 브루투스를 제거한 직후 안토니우스를 노려보는 옥타비아누스의 표정에서 끝내야 한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멜로는 본질을 흐리니까 슬쩍 건너가는 게 낫겠다고 했다. 18살 주인공을 누구로 캐스팅하느냐는 결정이 쉽지 않았다. 다만 원로원에 등장하여 연설하는 장면은 거두절미 롱테이크 원샷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역사 드라마를, 안판석(1961~2026.8.12)은 휴먼 드라마를 주창했다. 그는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얘기를 시작하면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드라마 말고는 그가 어떤 취미나 오락 또는 여가 생활을 즐기는지 알지 못한다. 흔히들 몰두하는 골프, 등산, 여행에 대해 관심 보인 적도 없었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 영자신문을 정독하며 사무실 출근은 해 질 무렵에 한다는 정도가 좀 특별하고 기이한 행동으로 소문나 있었다. 책 읽고 음악 듣는, 매우 지루한 일상 외에는 드라마가 전부였고 인생이며 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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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운명

지난 12일 오후 4시 좀 지나 부인으로부터 안 감독이 운명했다는 문자를 받았다. 뇌출혈로 쓰러진 지 3개월 남짓이다. 서울대병원에 차려진 빈소에 달려가니 후배 피디(PD)들이 모여 있었다. 우리는 충격과 추모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갈피를 잡지 못했다. 죽음은 늘 모순이다. 불합리하고 터무니없다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된다. 예상을 했음에도 닥치면 감당이 쉽지 않다. 묻고 싶었다. 그의 전화로 문자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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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석, 아직 할 일이 태산인데 무얼 그리 서둘러 떠나시나.”

2014년 3월5일 원효대교에서 드라마 ‘밀회’(JTBC)를 촬영 중인 안판석 감독(왼쪽)과 배우 김희애. 새벽 촬영에 김희애가 몹시 떨고 있자 안 감독이 머플러를 뒤집어씌우고 촬영 설명을 하는 장면. 장용우 감독 제공
2014년 3월5일 원효대교에서 드라마 ‘밀회’(JTBC)를 촬영 중인 안판석 감독(왼쪽)과 배우 김희애. 새벽 촬영에 김희애가 몹시 떨고 있자 안 감독이 머플러를 뒤집어씌우고 촬영 설명을 하는 장면. 장용우 감독 제공

#2. 부드러운 판돌씨

아침부터 조문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를 추모하는 사이버공간에 배우, 스태프들이 글을 남겼는데 ‘스승’ ‘멘토’라는 표현이 많았다. 신인은 물론이지만 스타 배우들이라도 스스로의 연기에 대한 확신을 갖기는 쉽지 않다. 예민하고 불안해하는 배우들에게 캐릭터와 신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시키는 것이 감독의 일이다. 문제는 방법이다. 안판석은 말이 다소 느린 편이다. 천천히 부드럽게 상대방의 입장에서 설득하고 격려하며 자신감을 주는 것은 좀 특별한 능력이자 타고나야 가능한 일이다. 배우들은 감성과 감각 기관으로 생존하는 사람들이다. 나를 대하는 것이 진정한 가르침과 애정인지, 좋은 사람인 척하는 건지 구분하는 데는 천재적이다. 안 감독은 배우를 정말 존중하고 염려하며 사랑했다. 작가에 대한 태도도 그랬다. 쪽대본으로 촬영하던 시절, 작가 곁에서 보채지 않고 격려하며 원고를 기다려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대본 늦게 쓰는 작가에 치를 떠는 대부분의 연출자들에게는 이해하기 힘들고 부러운 품성이다.

상가를 찾은 배우들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판석의 필모그래피가 참 다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희애는 평시에도 말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서로 인사하고 붉어진 눈빛만 교환했다. 송승환은 약해진 시력으로 반찬을 또박또박 챙겨 상갓집밥을 맛있게 드시고 “하…, 안 감독” 탄식을 뱉었다. 장현성과 유해진도 오래 자리를 지켜주었다. 정려원은 주위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내내 눈물을 훔쳐냈다. 한지민은 창백한 표정으로 얼음처럼 앉아 있었다. 백지원은 몹시 분하다는 표정으로 내내 눈물을 흘렸다. “아니, 이제 64세밖에 안 되잖아….” 유호정도 끄덕끄덕 “너무 안 됐어”를 연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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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통속과 품격 사이

드라마 ‘졸업’ 촬영 당시 배우 정려원과 안판석 감독. tvN 제공
드라마 ‘졸업’ 촬영 당시 배우 정려원과 안판석 감독. tvN 제공

장례 사흘째의 빈소는 눈에 띄게 조문객이 줄었다. 대부분 3일장을 의식해 어제가 마지막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다소 조용한 빈소에서 후배 피디들과 안 감독의 연출 스타일,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롱테이크를 즐겨 찍었다. 조금이라도 샷의 공간이 비거나 배우의 호흡이 맞지 않으면 망하는 촬영이다. 차라리 컷을 쪼개는 일이 쉽고 빠르다. 그래도 하나의 호흡으로 이어가는 것은 극의 긴장과 흐름에 유리하다. 안 감독은 시청자들이 좋아하는 통속한 드라마를 좀 품격 있고 예술적인 작품으로 승격시킬 수 있을지 고민했었다. 연기의 디테일, 기술의 절제가 만들어내는 미장센이 안판석의 스타일을 결정했다. 흥행을 전제로 하되 시의성 있는 주제를 선정하고 세련되게 다루는 솜씨가 그의 작품을 돋보이게 했다. 통속과 품격의 밸런스는 안 감독의 특기다.

드라마 ‘협상의 기술’ 촬영 현장의 안판석 감독. JTBC 제공
드라마 ‘협상의 기술’ 촬영 현장의 안판석 감독. JTBC 제공

#4. 결국, 우리는

아침의 발인제. 제단에 햄버거가 올려져 있었다. 우리는 촬영장에서 종종 햄버거를 시켜 먹었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사람들은 그가 햄버거를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밥 먹으러 오가는 시간 아껴서 대본 보고 다음 촬영 준비하려다 보니 햄버거나 김밥을 주문해 먹는 게 편리하기 때문에 생긴 버릇이었다. 제단의 햄버거로 상징되는 바쁜 인생이었다.

그는 ‘현정아 사랑해’ ‘하얀거탑’ ‘밀회’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를 포함한 27편의 드라마와 영화(연속극이나 미니시리즈도 한편이라 치고), 두번의 백상예술대상 연출상,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꼭 닮은 의젓한 아들과 딸을 남겼다. 영결식장에는 부인의 배려로 그가 좋아하던 비틀스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즐겨 입던 브루넬로 쿠치넬리 블레이저와 리바이스 청바지 차림이었다. 감독 안판석의 기나긴 롱테이크는 그렇게 끝이 났다. 그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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