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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November 6, 2026

“사랑”만 200번 넘게 쓴 시집…사랑을 사랑에 가두지 않는 반칙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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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시은 시인. 이른바 등단 절차 없이 2022년 첫 시집 ‘소공포’(민음사)를 출간했다. 4년 만에 펴낸 두번째 시집 ‘사랑 등등’을 두고 배 시인은 5일 한겨레에 “‘사랑’이란 단어가 이렇게 많이 나온 작품은 못 본 것 같다”며 “그러나 여기 사랑은 독자들이 기대하는 사랑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번 시집은 교보문고 출판 브랜드가 올 3월 개시한 ‘어떤시집 시리즈’의 두번째로 나왔다. 북다 제공
배시은 시인. 이른바 등단 절차 없이 2022년 첫 시집 ‘소공포’(민음사)를 출간했다. 4년 만에 펴낸 두번째 시집 ‘사랑 등등’을 두고 배 시인은 5일 한겨레에 “‘사랑’이란 단어가 이렇게 많이 나온 작품은 못 본 것 같다”며 “그러나 여기 사랑은 독자들이 기대하는 사랑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번 시집은 교보문고 출판 브랜드가 올 3월 개시한 ‘어떤시집 시리즈’의 두번째로 나왔다. 북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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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이 먼저 눈길을 붙든다. 시인 배시은(32)의 시집 ‘사랑 등등’은 1990년대생 ‘그’가 남긴 일기와 편지, 메모 등을 모아 ―가상의 인물인― 그의 ‘사랑’을 탐문하고 복원한 꼴(‘작업 노트’)을 취하고 있다. 한권의 ‘일지’로 수렴한 듯 시집의 목차는 ‘1월 1일’부터 ‘12월 29일’까지로 정렬해 있되, 1998년부터 2030년까지 두서없다. ‘일지’의 속성대로라면, 이것은 모두 과거, 즉 다 지난 경험들이다. 가령 2027년 11월, 2030년의 4월치조차 그러하다.

이와 같은 독특한 형식으로, 시의 감상이 다채로워지는 건 물론 때로 망연해질 법도 하지만, 시 안에서 결코 길을 잃을 수는 없겠다. 시집 중간 빈 페이지를 끼고, 어떤 시편에선 끝행으로 가며 활자가 퇴색할망정(이건 “의도는 아니었다”고 한다), 아방가르드인가 저어할 일이 못 된다. 근년 문학 출간물 가운데 “사랑”이라는 낱말을 이 시집보다 더 담은 작품은 보지 못했으니까.

배 시인도 5일 한겨레에 “‘사랑’이란 단어가 이렇게 많이 나온 작품은 못 본 것 같다”고 할 만큼, “사랑”만 200번 넘도록, 사랑을 옹알이고 적시고 말리고 쓰고, 감각하고 투정하고 질색하고 의심하고 비관하고 좌절하고 혐오하고 기다리고 궁구하고 또 궁구하여 초월하기까지, 여기 이토록 소곳하고 단정한 시어 아래 움킨 ‘사랑’의 에너지에 견주면…, 형식은 차라리 진부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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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생각하기’는 그 에너지를 가장 농축해 낸 한꼭지다. 시집에서 화자의 각별한 태도 하나를 꼽자면 ‘생각(하기)’일 터.

“그는 생각하기를 사랑한다. 나는 생각하기를 그렇게까지 사랑하는 것 같지는 않다. 생각하기는 더 이상 나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다./ 나는 차라리 그를 사랑한다./ 생각하기를 사랑하기보다는/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만 그를 사랑한다./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은 얼마나 크거나 혹은 작은 것일까.” “반칙을 쓰고 싶다. 사랑의 반칙을./ 생각의 반칙을.// 사랑을 사랑이라는 단어에 가두지 않는 반칙을.”(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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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바깥”의 사랑은 무엇인가. 아니 앞서, 사랑은 감각인가, 개념인가, 상상인가. 시집 속 ‘일기에게’라는 한 제목 다른 시 두편을 길잡이로 삼을 만하다.

“경험을 통해 깨달은 게 있어./ 항상 더 놀라운 것은 경험 바깥에 있다는 거야.”(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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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나는 사랑하지 않고 있구나/ 사랑하지 않음이 내 사랑을 이루고 있구나/ 사랑하지 않음이 나를 역으로 사랑하고 있구나// 나는 사랑 없음으로/ 사랑으로 나아간다……라고 중얼거렸지. (사랑중독자처럼)”(123쪽)

파다한 사랑으로부터 “경험 바깥”의 사랑, 급기야 ‘사랑 없음의 사랑’까지 사랑은 사랑으로 옮겨간달까. 미래와 과거가 뒤섞인 채 ‘그 모든 가능한 사랑’이 궁구되거나 이미 ‘체득’된 기록이 바로 ‘사랑 등등’이라 하겠다. 말인즉, 사랑은 귀납적으로 규명될 수밖에 없기에, 사랑에 관한 시집이라면 응당 ‘일지’가 타당한 셈이다.

사랑 등등 l 배시은 지음, 북다, 1만3000원
사랑 등등 l 배시은 지음, 북다, 1만3000원

이즈음에 호응할 ‘11월 14일·2025’라고 부기된 시 ‘편지’를 보자. “가장 나쁜 짓”을 하겠다 작정한 화자는 은둔자에게 편지를 보내기로 한다.

“은둔자는 편지를 읽음으로써 세상 바깥으로 나와야 한다/ 은둔자를 사랑한다는 건/ 은둔자를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다/ 어느 날 은둔자가 울면서 했던 말이 생각난다 누구도 나를 사랑하는 데 다다르지 못하면 어떡하지 그러니까 은둔자는 누구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게 두려운 게 아니라 누구도 자신을 사랑하는 데 다다르지 못하는 걸 두려워했다”(‘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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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행이 이 대목을 반전시킨다. “은둔자를 사랑하는 데 다다르는 건/ 은둔자를 잘 숨겨주는 일일지도 모른다 마침내 은둔자를/ 사라지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지도 모른다”(‘편지’)

이를 연인의 일로 본다면, ‘사랑함’이라는 관념과 ‘다다름’이라는 시·공간적 실체감 사이 스펙트럼에서 독자들은 제 처지에 따라 공명할 법하다. 그러나, ‘은둔자’가 마음속 ‘사랑’ 자체를 빗대고 있다면? 영국 고전 ‘두 도시 이야기’(찰스 디킨스)나 ‘폭풍의 언덕’(에밀리 브론테)에서 보듯, 어떤 사랑은 은폐하고 소거함으로써 가능해지는바, 사랑의 고통이 짐짓 서정한 시어 아래에서 본질로 여실해진다.

사랑은 무소불위가 되긴커녕, 언어조차 곡해되기 십상이다. ‘다다름’은 지난하다.

“언어가 나를 도저히 믿어주지 않았어” “나는 헛소문으로 가득 찬 건물 안에 있다.” “사랑이 이긴다는 구호는 너무 크고 두툼하다 (…) 그 아래 납작하게 깔려 있던 것들을 봐” 따위 파편적 시구들이 시 ‘사랑하기’를 구성하는 까닭이다. 급기야 화자는 말한다. “사랑받지 않으면 안전하다.”(‘만나서 반가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집은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시집에 흘려둔 웃음까지 적실하여, 비관을 비관하게 두지 않는다.

“믿기지 않는 것들을 모아다가 믿기지 않는다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 이마를 쓰다듬어주고 싶다 믿기지 않는다에게도 이마가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 그러면 잠깐은 뭔가 믿게 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것이 내 몫/ 그것이 가장자리”(‘율법’)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은 시간은/ 침묵할 것.”이라던 시인 강은교의 90년대 ‘사랑법’은 이렇게 21세기 엠지 세대의 ‘율법’으로 나아간 듯하다. 그리하여 “사랑을 사랑이라는 단어에 가두지 않는 반칙을” 생각하던 화자는 또 다른 ‘생각하기’(46쪽)에 다다르게 되는 건 아닐까.

“나는 그 생각이 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그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걷다가 그 생각이 저 이제 이쪽으로 가요 하고 멀어지려 할 때 저도 그쪽으로 갈래요 하고 그 생각을 따라 걸었다.” “그 생각을 따라 걷다 보니 나는 그 생각의 애인도 만날 수 있었다./ 그 생각의 애인과 그 생각과 나는 한 차에 탔다. 그 시간이 좋았다. 나는 단숨에 그 생각에게 줄 편지까지 썼다.”

그 편지가 막상 제 사랑을 위험에 빠뜨릴망정, 경험하고 실패하고 “사랑숭배자는 많은데 왜 사랑혐오자는 없는 거”냐 따져 묻게 되면서도, 거듭 사랑이 사랑으로 이어진다고 믿는 시집, ‘사랑 등등’이다.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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