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자(들)’에 자유언론실천선언 들어간 이유 [권태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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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릴 적 일이지만, 1974년 8월19일 육영수 여사 장례식 장면이 기억난다. 할아버지, 할머니 등 온 가족이 심각한 표정으로 중계를 지켜봤다. 꽃으로 뒤덮인 운구차가 청와대 문을 나설 때, 박정희 대통령이 차 뒤쪽에 손을 짚고 고개를 떨궜다. 이를 보던 어머니가 눈물을 줄줄 흘렸다.
추석 연휴 때, 영화 ‘암살자(들)’을 봤다. 논란이 일기 전이었다. 불이 켜졌을 때 영화에 대한 일감은, ‘당시 김대중 납치 사건(1973)으로 궁지에 몰린 중앙정보부가 대일본 관계 반전을 위해 자작극 소동을 벌이려다, 의도치 않게 육영수 여사 피격에까지 이르게 된 것’ 정도였다. 당연히 이를 온전히 믿지 않고, 영화적 상상력이 가미됐음도 충분히 인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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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지도 않고서, ‘박정희가 육영수를 죽였다니’라며 흥분하는 건 이성적이지 않다. 일부 정치권 인사들의 행태는 이를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북한상’ 혐오 발언, 유해진씨 집 앞 시위, 출연 광고 불매운동 등의 폭력적 행동은 창피스럽다. ‘5·18’, ‘노무현’, ‘세월호’ 등을 끌어들여 조응되지 않는 ‘미러링’을 시도하는 건 전혀 논리적이지 않다.
다만 영화는 추리극 형태를 기반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 여지를 열어뒀기에 보는 사람에 따라선 ‘박정희 배후설’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 측면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불필요한 영화 외적 논란을 줄이기 위한 ‘안전판’이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어쨌든 관객들은 바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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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에 대한 의문이 많은 건 사실이다. 그 이유는 중앙정보부의 공작 때문이라기보단, 당시의 권위적이고 폐쇄적인 정치·언론 환경, 공직자들의 책임회피성 은폐, 엉성한 사회 시스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탓이 더 크다고 본다. 따라서 50년 뒤에 이런 영화가 만들어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현재 논란은 온통 부풀려진 ‘박정희 배후설’에 머물고 있지만, 영화는 후반으로 갈수록 당시 엄혹한 사회상과 기자들의 분투에 더 할애한다.
영화 속 자유언론실천선언은 ‘육영수 피격 사건’과 관련이 없다. 1974년 10월23일 수원에서 서울대 농대생 300명이 유신반대 시위를 벌였다. 신문사 출입 기관원이 기사를 내지 말라고 했다. 동아일보 편집국장 송건호는 기사를 내보냈다. 중앙정보부는 송 국장 등 3명을 연행했다. 24일 동아일보 편집국에 기자 180여명이 모여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했다. 백지광고, 기자 134명 해직과 농성(1975년 3월)에 이어 3월17일 새벽, 각목을 든 괴한 200여명이 농성 중이던 편집국에 난입해 기자들을 때리고 끌어냈다. 영화 장면은 허구 아닌 실제였다. 이부영, 성유보 기자는 국가보안법, 긴급조치 9호, 국가모독죄 혐의 등으로 징역형을 살았다. 대법원은 39년 지난 2014년 무죄를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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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호 감독은 영화에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넣은 이유로 “폭력의 시대에 자기 신념을 지키면서 살았던 이들과 연결”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영화 내내 질문이 가시지 않았다. ‘저들은 무엇을 위해 저렇게까지 하는 것인가’, ’그 시대를 살았다면 저렇게 살 수 있었을까’.
기자들이 해고되는데, 편집국장이 그대로 있을 순 없다. 그럼에도 송건호는 사표 내기 전에 며칠을 고민했고, 두번이나 울었다고 했다. 다시는 언론계에 못 돌아온다고 생각했고, 학교 다니는 자식들(6남매) 공부는 어찌 시킬 것인가 고민이었다고 했다. 그는 “대책 없는 실직은 현기증을 일으키는 공포였다. 내일은 또 어떻게 먹고사느냐가 제일 고민”이라고 회고한 적 있다.
송건호를 모델로 한 듯한 영화 속 사회부장(박해일)은 기자 정신에 충만해 한치 망설임도 없을 만큼 강직하다. 그러나 송건호가 ‘제일 고민’이 이 땅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가족 부양이었다고 말한 것, 그리고 사표 내기 전 며칠을 고민했다는 그 인간적 고뇌에 더 마음이 쓰인다.
주저하지 않는 사람은 온전히 신뢰할 수 없다. 기자 일이란 것도 ‘확신’보다 ‘의심’에 기반한다. 그래서 확신하는 기자는 위험하다. 기자는 진실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고, 그저 가까이 가려는 사람일 뿐이기 때문이다. 지닌 무기도 ‘의심’과 ‘질문’뿐이다. 그 의심과 질문은 스스로를 향하기도 해야 한다. 확신에 차 거침없는 사람보다, 외려 망설이고 주저하며 한 걸음씩 겨우 디디는 사람이 오히려 흔들리지 않고,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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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건호는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정권의 관직 제의를 여러번 뿌리쳤고, 1980년 5월15일 지식인 시국선언을 주도했다. 신군부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과 옥살이를 했다. 고문 후유증으로 노년에 파킨슨병을 오랫동안 앓았다. 한겨레 논설위원실에는 두명의 사진이 걸려 있다. 리영희 전 논설고문과 송건호 전 회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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