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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November 5, 2026

‘대남 납치실무자’였다는 자가 어느날 찾아왔다 [금자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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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2월19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임시정부 환국 환영대회 단상에 김구·김규식·엄항섭(왼쪽부터) 등 임시정부 인사들이 앉아있다. 김구는 1949년 6월26일 암살당했고, 김규식과 엄항섭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북한에 의해 납치됐다. 한겨레 자료
1945년 12월19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임시정부 환국 환영대회 단상에 김구·김규식·엄항섭(왼쪽부터) 등 임시정부 인사들이 앉아있다. 김구는 1949년 6월26일 암살당했고, 김규식과 엄항섭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북한에 의해 납치됐다. 한겨레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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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국가권력에 의해 ‘프락치’로 몰려 구원받지 못한 채 북으로 간 국회의원들. ‘금자’는 소녀 금자의 시선을 따라 70년이 훌쩍 넘은 그 시간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대한민국 친위쿠데타와 내란의 기원을 마주한다. 월화수목금 연재.

문자메시지에 찍힌 약속장소는 전철 4·7호선 이수역 출구 앞 스타벅스였다. 장소 변경을 제안하려다가 말았다. 최근 들어 즐겨찾지 않는 카페라서가 아니었다. 대화를 나누기에 시끄럽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압록강변의 겨울’을 쓴 이태호 선생(81)을 스타벅스가 아닌 맥도날드에서 만났다. 약속 시각 30분 전 들어간 스타벅스엔 자리가 하나도 없었다. 무엇보다 소음을 견디기 힘들었다. 적당한 장소를 다시 물색한 끝에 바로 옆에 있는 맥도날드에서 조용한 자리를 잡았다. 이 선생은 제법 묵직해 보이는 배낭을 메고 모자에 등산화 차림으로 바뀐 장소에 왔다. 가방 속엔 근처 알라딘 중고서점에 들러 산 책이 들어있다고 했다. 커피와 감자튀김, 치즈스틱을 앞에 놓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햇살이 따가운 9월 초순의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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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그분을 처음 만나신 거죠?”

“어느 날 낯선 사람이 제가 일하는 사무실로 찾아왔어요. 북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다가 제3국을 통해 망명했다고 자신을 소개했죠. 그러면서 자신의 증언을 책으로 써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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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출간된 ‘압록강변의 겨울’ 표지를 펼친 모습.
1991년 출간된 ‘압록강변의 겨울’ 표지를 펼친 모습.

1991년 10월 출간된 ‘압록강변의 겨울’ 표지엔 ‘이태호 저, 신경완 증언’이라고 돼 있다. 이 책을 소개해준 이들은 국회프락치 사건 유족이었다. 제헌국회의원 강욱중의 아들이자 강금자 여사의 동생 강호림, 김옥주 의원의 아들 김진원, 노일환 의원의 큰손자 노주상 선생 등이 이 책을 입에 올렸다. 제헌국회의원들이 스스로 월북한 게 아니라 납북되었음을 생생히 드러낸다고 했다. 강욱중·노일환의 유족은 국무총리 소속 6·25전쟁납북피해진상규명위원회에 납북신고서를 제출할 때 이 책 내용을 복사해 첨부했다. 중고책을 구해 읽어본 뒤, 저자 이태호 선생의 연락처를 수소문해 만남을 청한 이유다.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서울을 점령한 북한은 김규식·조소앙·엄항섭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 국회의원, 사회단체 대표, 유명 문인 등을 ‘모시기 공작’이라는 이름으로 연행해 갔다. 민족주의 진영 등 중도파를 포섭하려는 목적을 띤 이 공작의 이름은 ‘모시기’였지만, 실제로는 납치였다. 여기엔 국회프락치 사건에 연루된 13명의 제헌국회의원 중 12명도 포함돼 있었다. ‘압록강변의 겨울’에서 증언자 신경완은 그렇게 북한으로 끌려간 인사들이 북한에서 어떤 경로를 거쳐 정착해 생활하게 되는지, 북한 당국과는 어떻게 줄다리기하며 자신들의 뜻을 펼치려 하는지, 생을 마감한 최후의 순간은 어떠했는지를 마치 옆에서 본 것처럼 세밀하게 말했다. 신경완은 그 ‘모시기 공작’의 실무자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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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왜 하필 선생님한테 찾아왔을까요?”

“그게 참…본인이 무안 출신인데 광주에 있는 사촌 여동생에게 글을 써줄 사람이 없는지 물었대요. 그 여동생은 바로 저의 외삼촌과 재혼한 분이었어요. ‘동아일보에서 기자 일을 하다가 박정희랑 갈등을 빚고 해직됐다’면서 저를 추천한 거죠. 제가 광주에 내려가 그 외숙모를 만나서 확인해봤더니 사실이더라고.”

“신경완이라는 이름은 가명이잖아요.”

“자기 이름을 알려고 하지 말랬어요. 북에서 모르게 남한에 왔는데, 노출되면 북에 있는 가족이 죽거나 다친다면서. 그의 본래 성이 박씨라는 건 책 내고 몇 년 뒤 조선일보 출신 기자에게 들었어요. 본명은 그러고도 20년 뒤에 알게 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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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7일 서울 이수역 인근의 한 패스트푸드점에서 만난 이태호 선생이 자신이 쓴 ‘압록강변의 겨울’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고경태 기자
지난 9월7일 서울 이수역 인근의 한 패스트푸드점에서 만난 이태호 선생이 자신이 쓴 ‘압록강변의 겨울’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고경태 기자

이태호 선생은 기자 출신이다. 1970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5년간 동아방송 사회부에서 경찰서를 출입했다. 1975년 동아일보 기자들이 검열 등 정권의 언론통제에 맞서 저항한 자유언론실천운동에 가담했다가 해직된 뒤엔 열악한 노동현장과 노동자들의 삶을 취재한 ‘불꽃이여 이 어둠을 밝혀라’(돌베개), ‘70년대 현장’(한마당), ‘근로자의 벗’(일월서각) 등의 책을 썼다. 기자직에서 쫓겨나서도 기자처럼 현장을 지켰다. 그러다 1988년 창간한 한겨레신문에 잠시 몸을 담갔다. 1989년엔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 내는 평화신문에 이어 평화방송으로 옮겼다. 신경완이라는 인물이 찾아온 것은 1990년 평화방송 취재부장 겸 해설위원으로 일하던 때였다.

그는 신경완과 수십번 만나 인터뷰를 했다. 카페는 피했다. 미행당해 사진을 찍힐 수 있다는 이유였다. 주로 조용한 공원에서 2~3시간씩 증언을 들었다.

“그분이 실무 책임자였다고요?”

“한국전쟁기에 최초로 대남공작부서의 납북 담당 책임자 역할을 했다는 거죠. 대남공작부서는 대남연락부, 문화부, 통일전선부 등으로 이름이 계속 바뀌죠. 거기서 나중엔 부부장까지 올라요. 부장은 김정일이고, 부부장이 그다음인데 여러 사람이 있었어요. 신경완은 자신이 남한 쪽의 명망 있는 인사들을 담당해 100명 가까이 만포까지 직접 데려왔다고 했어요. 다시 말해 ‘납치 실무책임자’인 거죠. 조선일보 사주였던 방응모가 폭격당해 죽는 모습도 목격했다고 하고.”

모시기 공작, 아니 납치공작은 북한이 서울을 점령한 6월28일 조선노동당 군사위원회에서 “남반부의 정치·경제·사회계 주요 인사들을 포섭하고 재교양하여 그들과 통일전선을 강화할 데 대하여’라는 결정이 채택되면서 전개됐다. 김일성의 특별지시에 따라 7월부터 본격적인 공작이 시작됐다. 30개 전문 공작조 수백명의 전문 정보요원이 데려갈 인사들과 그들의 친인척 집을 찾아 나섰다. 예우와 회유가 동원됐다. 강제연행된 인사들은 군 트럭을 타고 7월부터 3개월간 네 차례에 걸쳐 미군 폭격을 피하며 평양으로 향했다.

이들은 대부분 길어야 2~3개월 북한에서 사상 재교육을 받고 오는 줄만 알았다고 한다. 처음엔 평양 인근 공공기관이나 여관에 머물렀다. 그러나 9월28일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뒤 서울을 수복하고 북으로 치고 올라오자 상황이 변했다. 10월19일 평양이 유엔군과 국군에 함락됐다. 납북 인사들은 후방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그렇게 하여 간 곳이 자강도의 만포시 별오동이었다. 1950년 겨울을 보내야 했던 이곳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 지린성 지안시와 마주 보는 국경도시다.

만포로 오던 도중 산을 넘다 낙오해 민족사학자 정인보가 사망했고, 임시정부의 부주석을 지낸 김규식은 1950년 12월 지병이 악화하여 만포의 군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1954년 평양 근교 용성에 완전히 자리를 잡기 전까지 이들은 만포와 평양을 위태롭게 오가야 했다. ‘압록강변의 겨울’이라는 제목엔 납북인사들이 그 겨울에 국경도시에서 견뎌야 했을 혹독한 추위와 불안, 공포가 스며있다.

“이들은 모두 납북됐다고 봐야 하나요?”

“다 납북이라고 봐야죠. 신경완 본인이 납치 담당이었다고 자인하고 있으니까요. 물론 어떤 사정과 이유에서든 북한으로 오길 원한 사람도 없지 않았겠죠. 그걸 ‘월북’으로 봐야 하는지는 애매하네요. 그래도 이들이 올라가기 전에 북에서 적극적으로 행동한 건데 납북이라고 봐야죠.”

“북한이 국회프락치 사건 관련 의원들에게 크게 비중을 뒀을까요?”

“그럼요 주요 인사였죠. 김일성이 젊은 국회의원들을 귀엽게 봤죠.”

“근데 책의 묘사가 정말 구체적이에요. 납북인사들을 따라다니면서 다 기록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최초 납치공작 실무책임자로서 자기가 부서를 바꾸어 일할 때도 납북인사들의 행적에 대한 보고를 다 받았다고 해요. 그래서 돌아가신 분들의 유언까지 들어가 있잖아요. 그분의 기억력이 비상했어요. 물론 틈틈이 기록해 놓은 메모 같은 것을 보고 팩트를 이야기해줬어요.”

“모시기 공작이 우리 현대사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김일성 입장에선 이들을 설득하고 회유해서 남쪽을 작살내기 위한 의도였는데, 강제납치니까 대단히 무리수였죠. 다만 당사자들을 골탕 먹이고 고문하거나 죽이기 위해 데려간 건 아니었을 거예요. 그런데 가족까지는 전혀 생각 안 했겠지. 끌려간 분들이 대단한 게, 유언이 숙연해요. 극한상황에서도 끝내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은 훌륭한 분들이 많습니다.”

‘압록강변의 겨울’ 출간 직전 책의 내용을 1면 머리기사로 보도한 1991년 10월1일자 동아일보. 지면 갈무리
‘압록강변의 겨울’ 출간 직전 책의 내용을 1면 머리기사로 보도한 1991년 10월1일자 동아일보. 지면 갈무리

책 속에서 납북인사들은 서로 의견이 갈려 논쟁을 벌이다가 급기야는 극렬하게 갈등하기도 한다. 김약수·노일환·이문원·김병회·김옥주·강욱중·황윤호 등 국회프락치 사건 관련 의원들 사이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신경완은 책에서 “국회 내 투쟁의 지도선 문제를 놓고 줄곧 팽팽한 의견대립을 빚어온 이들이 한 치도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며 “이 투쟁을 남로당 쪽이 조직·지도했느냐, 북로당계의 성시백 선이 조직·지도했느냐, 이것이 문제였다”고 증언했다.

이는 국회프락치 사건 유족들에게 불편한 대목이다. 남로당과 북로당 쪽은 국회프락치 사건이 서로 자신들의 공작 결과라고 주장했고, 당사자인 제헌국회의원들도 두 입장을 놓고 옥신각신했다는 내용이 책에 나온다. 이태호 선생은 “신경완은 프락치 사건이 사실상 존재했던 것처럼 이야기했다”고 말했다.

이제 신경완이라는 인물이 누구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22년생인 그는 1998년 숨을 거두면서 세상에 본명을 드러냈다. 박병엽. 2007년 국정원 보고서에서는 ‘도원1호’로 등장한다.

<다음 회에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추적한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과 유해발굴을 통해 한국전쟁의 상흔을 드러낸 ‘본헌터’를 썼다. 그밖의 지은책으로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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