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관 22명 임명 ‘주도권’ 노린 의도된 신경전
“손봉기 판사 본인도 대통령과 교류(협의) 없이 대법관 임명 제청이 진행됐다는 걸 전혀 몰랐던 것 같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걱정스럽다.”
손봉기 대구지법 부장판사와 가까운 한 부장판사는 19일 기자와 통화하며 이렇게 말했다. 전날 조희대 대법원장이 노태악 전 대법관 후임으로 손 부장판사를 이재명 대통령에게 ‘서면 제청’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정치·법조계에서 후폭풍이 이어지고 있다.
그간 대법원장이 청와대와 사전 협의를 거친 뒤 직접 대면해 임명 제청하는 것이 오랜 관례였다. 조 대법원장은 사전 협의도, 대면 제청도 하지 않은 것이다. 여권에서는 조 대법원장을 향해 “자리에서 물러나라”는 등 격앙된 반응을 쏟아내고 있다. 대법원장의 ‘제청권’과 대통령의 ‘임명권’이 정면충돌하는 양상이다.
조 대법원장은 이날 출근길에 서면 제청 배경을 묻는 질문에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법조계에서는 조 대법원장이 헌법에 보장된 본인의 권한을 ‘있는 그대로’ 행사한 것으로 본다. 헌법은 대법관을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대통령과 사전 협의를 거쳐야 한다는 명시적인 규정은 없다.
한 부장판사는 “대법원장이 더 이상 제청을 미루기 어려웠던 상황을 고려해야 하지 않겠나”라고 설명했다. 노 전 대법관 퇴임 이후 후임 인선이 반년 넘게 지연됐고, 오는 9월에는 이흥구 대법관까지 퇴임을 앞두고 있어 제청을 미루는 것이 ‘직무유기’라는 비판이 계속됐다. 양측이 계속 평행선을 달리는 상황에서 조 대법원장이 먼저 제청권을 행사했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향후 대법관이 26명으로 증원되는 시기를 앞두고 대법관 인선을 둘러싼 사법부와 청와대의 ‘힘겨루기’ 국면에서 조 대법원장이 ‘선수’를 쳤다는 분석도 있다.
이 대통령은 임기 내에 대법관 22명을 순차적으로 임명하게 된다. 이번 제청을 통해 인선 과정의 주도권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보여줄 수 있다는 점도 조 대법원장의 결단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란 분석이다. 대법관 제청은 대법원장의 권한이고, 임명은 대통령의 권한인 만큼 어느 한쪽이 상대방에게 결정을 강요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라는 판단이 작용했을 수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법조계에선 조 대법원장의 서면 제청을 놓고 절차적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합의까진 이르지 못하더라도 청와대와 충분히 협의하려는 노력을 한 뒤 직접 만나 ‘이런 이유로 이 후보자를 제청할 수밖에 없고 최종 판단은 대통령에게 맡기겠다’고 하는 방식이 적절했다는 것이다. 서면으로 제청한 것은 기존 관례와 달라 대통령의 임명권에 대한 도전으로 비칠 여지가 있다는 설명이다.
서면 제청 논란을 둘러싼 ‘공’은 결국 이 대통령에게 넘어갔다. 만약 이 대통령이 임명권을 행사하지 않고 미루거나 버티면 사법부와 극렬 대립하는 형태로 사태가 확산하게 된다.
노경필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은 이날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출석해 “헌법에 따라 대법원장은 대법관 후보를 제청할 권리가 있고 거기에 따라 대통령과 국회는 각각 임명권과 동의권을 행사하면 된다”며 “(만남을) 요구했는데 안 됐다. 서면 제청하는 것은 청와대 민정수석과 협의했다”고 말했다. 그는 “후보 추천을 다시 하는 방법도 고려해봤지만 기존 후보 중 반대하는 분이 있어 폐기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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