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aily Newsstand · Free, Always
Friday, October 23, 2026

20대 여성 그림책 작가에게 투영한 노 작가 하루키의 자화상 [.txt]

Translate
무라카미 하루키가 2018년 11월8일 에콰도르 수도 키토의 국립극장에서 열린 행사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20대 여성 그림책 작가의 이야기를 다룬 신작 ‘가호’에서는 창작자인 하루키 자신의 면모가 엿보인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무라카미 하루키가 2018년 11월8일 에콰도르 수도 키토의 국립극장에서 열린 행사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20대 여성 그림책 작가의 이야기를 다룬 신작 ‘가호’에서는 창작자인 하루키 자신의 면모가 엿보인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광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가호’에서 가장 눈에 뜨이는 것은 주인공 가호가 이야기 그림책을 쓰고 그리는 작가라는 사실이다. 비록 장르가 다르기는 해도 가호가 이야기를 다루는 창작자라는 설정은 그에게서 소설가인 하루키 자신의 면모를 엿보도록 이끈다. 작품 속에는 이야기에 관한 언급이 자주 나오며, 가호는 작품이 진행되는 동안 두편의 이야기를 완성하고 다른 한편을 사실상 마무리한다.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이 이야기를 둘러싸고 내놓는 견해에는 소설에 관한 하루키의 생각이 담겼다고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림책 작가라는 사실을 제하면 20대 여성인 가호는 기왕의 하루키 소설 주인공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느 날 문득 모종의 계기로 인해 일상에서 벗어나 비일상의 세계로 접어들고 그곳에서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며 성장하고 깨달음을 얻은 뒤 일상으로 복귀한다는 전형적인 틀에서 그 역시 멀리 있지 않다. 가호는 브라질 정글에서 온 개미핥기 부부와 흰개미 여왕, 재규어 같은 동물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며 그들과 협업하거나 대결을 펼친다. 가호가 놓인 상황과 그가 겪는 사건들은 꿈과 현실의 경계를 무람없이 넘나드는데, 그에 대해 개연성과 핍진성의 잣대를 들이대며 따지는 일은 ‘반칙’에 해당한다.

비교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은 세계 곳곳의 영웅 이야기가 출발-입문-귀환이라는 동일한 순환 구조를 띤다고 파악했다. 하루키 소설 주인공들의 여정은 캠벨이 말한 순환 구조를 보이며 그런 점에서 그들은 신화적 성격을 지닌다. ‘가호’에서 주인공이 개미핥기 부인의 권유에 따라 살던 집을 떠나 낯선 동네로 이사를 가는 게 신화적 출발이라면, 그곳에서 그가 재규어와 흰개미 여왕, 자신의 어머니 같은 존재들과 얽혀 벌이는 모험은 입문에 해당하고, 모든 일들이 마무리된 뒤 그가 다시 작업용 책상으로 돌아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마지막 장면은 귀환을 상징한다.

광고

가호 l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문학동네, 1만8500원
가호 l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문학동네, 1만8500원

이 소설에서 핵심을 이루는 갈등은 가호와 그의 어머니 사이에서 벌어진다. 개미핥기 부부와 흰개미 여왕, 재규어 같은 동물들은 가호 모녀의 문제가 불거졌다가 풀리는 과정에서 우화적인 구실을 할 따름이다. 모녀의 갈등 요인이 작품 속에서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요인과 갈등 해소 과정이 그 자체로 중요해 보이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가호와 어머니 사이에 모종의 갈등이 있고 그것이 지극히 하루키스럽게 봉합된다는 사실에 있다.

독자로서 주인공 모녀의 갈등의 세목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가호가 현실에서 겪는 사건들이 그가 쓰는 이야기에 반영되는 양상들이다. 소설 안에서 가호가 쓰는 이야기들에는 그 자신의 경험이 변형되어 담긴다. 첫 작품은 한 소녀가 자기 얼굴을 찾으러 가는 이야기이고 여기에는 개미핥기 부부가 카메오로 등장한다. 가호가 이 작품을 쓰게 된 것은, 편집자의 소개로 만났던 남자가 대뜸 그의 얼굴을 두고 모욕적인 평을 퍼부은 일과 무관하지 않다. 개미핥기 부부가 천적인 재규어를 물리치는 과정을 그린 두번째 작품, 그리고 한 어린 소녀가 감추어진 비밀 출구를 찾는 세번째 작품은 모두 어머니와의 갈등이라는 문제에 부닥쳐 그 해결을 위해 분투하는 가호 자신의 관심사를 은유하는 것으로 읽힌다.

광고

광고

소설 속에서 가호가 완성한 첫번째 그림책은 독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가호 자신의 마음도 치유한다. 이 책의 아이디어를 어디에서 떠올렸느냐는 편집자의 질문에 가호는 “어딘가 어둡고 깊은 곳에서”라고 답하는데, 이 말에서는 하루키의 주인공들이 통과의례처럼 거치곤 하는 동굴과 우물 또는 지하 세계가 떠오른다. 개미핥기 부부 등이 브라질 정글로 오가는 통로나 가호가 재규어 및 흰개미 여왕과 대결을 펼치는 ‘칼 가는 집’이 바로 그런 공간에 해당한다.

“현실은 얼마나 얄팍한 것일까. (…) 반면에 흰개미 여왕이며 개미핥기 부부며 BMW(베엠베) 모터사이클을 타는 수호천사, ‘칼 가는 집’의 귀가 뾰족한 주인… 이들은 내게 얼마나 확실한 존재감을 느끼게 하는가. (…) 그렇다, 그들은 메타포인 동시에 명백한 실체다.”

광고

가호의 시점으로 서술되는 이 대목에서 하루키는 객관적 현실에 비해 은유적 존재들의 실체감이 더 두터우며, 그런 의미에서 사실보다 허구의 세계가 더 진실되다는 주장을 펼치는 듯하다. “내가 알고 싶은 건 어디까지나 진실입니다. 아무리 현실과 동떨어지고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진실이라 하더라도…”라는 ‘칼 가는 집’ 주인의 말이 그에 공명한다. 그런가 하면 개미핥기 부인은 가호에게 이렇게 말한다.

“왜냐하면 이건 당신 자신의 세계 속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필연적으로 그 세계의 중심이 됩니다. 그래서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선도 악도 아닌 것도 다 같이 당신 품으로 밀려듭니다. (…) 그리고 당신은 밀려드는 그것들 가운데서 어떤 것은 기꺼이 받아들이고 어떤 것은 단호히 제거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주인공인 당신의 책무입니다—받아들일지 내칠지 판별해서 좋은 이야기로 만들어가는 것, 그게 당신 역할입니다.”

이 말은 누구나 각자의 이야기 세계에서는 신화적 주인공의 역할을 맡아서 그에 걸맞은 선택을 해야 한다는 뜻과 함께, 소설을 쓰는 하루키 자신의 태도 역시 가리키는 것처럼 읽힌다. “좋은 이야기에는 반드시 어떤 유용성이 포함되어 있지”, “내게는 그 소녀의 운명을 주시할 책무가 있다. 누가 뭐래도 내가 이 이야기의 화자니까”, “이야기는 창작자인 그녀의 계획이나 의견과는 무관하게 그 자체의 힘으로 자연스럽게 나아가기 시작한 듯했다”처럼, 이야기의 속성과 역할을 설명하는 문장들에서도 하루키의 목소리는 들리는 듯하다. 무엇보다, 소설의 이런 마지막 문장에서 긴 투병을 마친 뒤 이 작품을 완성했다는 노 작가 하루키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기란 어려운 노릇이다.

“세면대 거울을 보며 크게 한번 심호흡한 다음, ‘미소라 이야기’를 완성하기 위해 늘 앉는 작업용 책상 앞으로 돌아갔다.”

View the original on 한겨레 →

KioskNews shows a cleaned-up reading view extracted from the publisher’s page — the original always lives on their site, not ou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