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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September 29, 2026

남성이 표준인 세계에서, 여성 용접사의 손에 맞는 장갑을 만들다 [플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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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가 적다는 이유로 여성 작업자들이 10년, 20년 몸에 맞지도 않는 남성용 장갑만 쓰면서 일하는 건 정말 안타깝잖아요. ‘누군가는 시도를 해봐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 여성용 용접 장갑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전북 익산에서 농기계를 만드는 이항씨(41)는 최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15년간 초등학교 교사로 일한 이씨는 2023년 교직을 그만두고 아버지가 40여년간 운영한 농기계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공장에서 생산 공정을 배우며 직접 용접도 하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용접하는 모습을 숱하게 봤지만, 직접 ‘고데(용접 토치)’를 잡는 건 전혀 달랐다.

2023년 6월 한 여성용접사가 자신의 손보다 큰 용접 장갑을 끼고 있다. 이 장갑은 손가락 끝부분이 항상 남아 뜨거운 불과 열에 의해 타기 일쑤다. 권도현 기자

2023년 6월 한 여성용접사가 자신의 손보다 큰 용접 장갑을 끼고 있다. 이 장갑은 손가락 끝부분이 항상 남아 뜨거운 불과 열에 의해 타기 일쑤다. 권도현 기자

“처음 불꽃이 튀는 순간 놀라서 손을 떼버렸어요. 용접면을 쓰면 어두워서 주변도 잘 안보였고, 기술이 없으니 용접 부분이 삐뚤빼뚤하기만 했죠.”

낯선 기계와 새로운 일에 적응하는 것보다 더 난감한 건 몸에 맞는 장비를 찾는 일이었다. 특히 체구가 작은 그에게 남성 신체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기존 작업복과 안전 장비, 그중에서도 장갑은 오히려 일을 방해하는 도구가 됐다.

맞는 장갑이 없다는 여성 용접사들에게, 3년만에 도착한 한 독자의 답장

이씨는 “여성치고도 손이 작은 편이라 남성용 프리사이즈 아르곤 용접 장갑을 끼면 손가락 끝이 2㎝ 넘게 남았다”고 말했다. 두꺼운 가죽장갑 안에서는 손가락이 헛돌았다. 작은 재료를 떨어트리거나 몇 번씩 토치를 고쳐잡는 일이 많았고, 작업으로 인한 피로는 쉽게 쌓였다. 어떻게든 고쳐보려고 남성용 장갑을 뒤집어 뜯은 뒤 손가락 끝을 잘라 다시 재봉하기도 했다. 하지만 장갑 하나를 고치는 데 시간과 품이 많이 너무 많이 들었고, 그렇게 고쳐도 오래 쓰지 못했다.

‘안 그래도 생소한 일을 배우는데, 왜 내가 장비까지 직접 만들어야 하는 걸까.’ 의문이 끊이지 않던 그 무렵, 이씨는 경향신문의 ‘당신은 무슨 옷을 입고 일하시나요’ 시리즈 중 여성 용접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기사를 읽게 됐다. 기사에는 여성 용접사들이 몸에 맞는 작업복과 보호장비를 구하지 못해 직접 줄여 쓰고, 특히 장갑은 수선하거나 대체하기조차 어렵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씨는 “기사를 보고 너무 반가웠다.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다른 여성 용접사들의 인터뷰와 영상들을 더 찾아보면서 “다른 건 몰라도 장갑은 누가 좀 만들어줬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접했다. 그때 생각이 굳어졌다. ‘대체재도 없고 수선도 어려운 장갑만큼은 내가 직접 만들어보자.’

국내에서 원하는 형태의 용접장갑을 생산하는 업체를 찾았지만 쉽지 않았다. 무역이나 유통업을 해본 경험도 없었다. 결국 해외 생산업체를 하나씩 수소문했고, 마침내 여성 손 크기에 맞춘 용접 장갑을 제작 주문하게 됐다. 농기계 제조업을 이어가는 한편 여성 현장 노동자들을 위한 작업용품 브랜드 ‘그릿핏 워크웨어’를 만들었다.

[플랫] 남성 기준의 ‘작업복’ 여성 노동자를 위한 ‘안전장비’는 없다

이씨가 일하는 제조 현장에서는 생산 공정에서 일하는 여성을 좀처럼 찾기 어렵다. 여성용 장비를 만든다고 해도 시장이 크지 않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어렵사리 만든 이유를 물었다. “여성이 적으니 여성용 장비가 없고, 장비가 없다는 불편은 다시 현장에 들어온 여성 개인이 감당하는 악순환은 계속되어선 안 된다”는 답이 돌아왔다.

장갑을 제작한 뒤 이씨가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들은 3년 전 기사에 나왔던 여성 용접사들이었다. 그는 최근 기자에게 직접 메일을 보내 “당시 기사에 등장했던 여성 용접사분들께 장갑을 보내드리고 싶다”고 했다. 현장에서 오랫동안 일한 여성들이 써본 후기를 바탕으로 부족한 점을 개선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앞으로는 각반과 앞치마 등 용접 보호구를 만들고, 이후에는 작업복까지 제품군을 넓힐 생각이다. 용접뿐 아니라 전기·목공·조경·도배·미장·건설 등 여러 현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몸에 맞는 옷과 장비를 선택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이씨의 목표다.

“지금 작업복과 안전 장비는 남성들이 주요 수요자이다 보니 전체적인 패턴이 남성에게 맞춰져 있어요. ‘현장에서 일하는 여성 전문가를 위한 워크웨어’를 오래, 지속 가능하게 만들어내고 싶습니다. 이런 일을 통해 젊은 여성들도 앞으로 현장직으로 더 많이 유입되면 좋겠습니다.”

▼ 김정화 기자 clean@khan.kr

더 많은 산업 현장에 여성이 뛰어들길, 그가 낸 오솔길이 더 넓은 길로 이어지길

여성 노동자들을 위한 작업용품을 만든 이항씨가 여성의 손 크기에 맞춰 제작한 용접 장갑(오른쪽)과 기존 장갑. 이항씨 제공

여성 노동자들을 위한 작업용품을 만든 이항씨가 여성의 손 크기에 맞춰 제작한 용접 장갑(오른쪽)과 기존 장갑. 이항씨 제공

2023년 경향신문 기획 기사 ‘당신은 무슨 옷을 입고 일하시나요’는 일터에서 노동자들이 일할 때 입는 작업복에 관한 이야기를 다뤘다. 그전까지 우리는 여성 노동자들이 몸에 맞지 않는 작업복을 수선해 입는 현실을 깨닫지 못했다. 남성 발에 맞춰진 작업화를 착용하느라 양말을 세 켤레씩 겹쳐 신고, 깔창까지 덧대어 신는다는 것도 기사를 통해 알게 된 이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오랫동안 눈여겨보지 않은 테마를 다룬 이 기사는 여성에 대한 또 하나의 보이지 않는 차별에 눈뜨게 했다.

기사는 남성이 표준인 세상에서 여성의 존재가 지워지는 사례들을 보여준다. 여성 용접사들이 단적인 예다. 한국인 표준 인체 치수에 따르면 30대 여성의 평균 손 길이와 너비는 각각 17㎝, 7.3㎝다. 30대 남성보다 길이도, 너비도 1~2㎝ 짧다. 남성 사이즈에 맞춰진 시판용 용접 장갑을 여성들이 끼면 손가락이 안에서 헛돌아 정밀한 조작은 고사하고 용접봉을 떨어뜨리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큰 용접 장갑은 노동자의 안전과도 직결된다.

전북 익산에서 농기계 제조업을 하는 이항씨도 같은 고충을 겪었다. 이씨는 교사로 일하다 가업을 잇기 위해 일을 배웠다. 용접 기술을 익히기도 힘들었지만, 장비가 몸에 맞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용접 장갑을 끼면 손가락 끝부분이 2㎝ 넘게 남아 돌았다. 이씨는 경향신문 기사를 읽고 여성 용접사들이 장갑 때문에 어려움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목마른 이가 우물 파는’ 격으로 기사를 접한 이씨가 장갑을 직접 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숫자가 적다는 이유만으로 몸에 맞지 않는 장비를 쓰며 작업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이씨는 여성 노동자들을 위한 작업용품 브랜드까지 만들었다.

최근 이씨가 경향신문 담당 기자에게 e메일을 보냈다. “여성 용접사들에게 장갑을 보내드리고 싶다”는 내용이다. 그는 장갑을 만들고 취재에 응했던 여성 용접사들이 먼저 떠올랐다고 한다. 남성용 장갑으로 작업하며 고충을 겪던 여성 용접사들은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게 된 셈이다. 더 많은 여성들이 산업 현장에 뛰어들기를 바라는 마음도 더했다. 덕분에 ‘남성이 표준’인 세상을 살아가는 여성의 노고를 곱씹게 된다. 그가 낸 오솔길이 더 넓은 길로 이어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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