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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September 10, 2026

‘고독한 천재’ 신화를 넘어, ‘호킹’이라는 네트워크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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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호킹이 2008년 4월 미국 조지워싱턴대에서 미국항공우주국(NASA) 창설 50주년 기념 강연을 하는 모습. 위키미디어 코먼스
스티븐 호킹이 2008년 4월 미국 조지워싱턴대에서 미국항공우주국(NASA) 창설 50주년 기념 강연을 하는 모습. 위키미디어 코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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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랑에 대한 모든 것’(2014)은 영국 출신 이론물리학자 스티븐 호킹(1942~2018)의 삶을 재연한 작품이다. 대학 시절 만난 첫번째 아내 제인과의 사랑과 결혼, 이혼에 이르는 관계가 씨줄로, 세속의 삶이 힘들수록 깊게 파고든 학문의 여정이 날줄로 짜였다. 아 름다운 영상미와 에디 레드메인(스티븐 호킹 역)의 인상적인 연기가 돋보인다. 영화 원제 ‘The Theory of Everything’은 물리학에서 우주의 모든 원리를 하나의 이론적 틀로 통합해 설명하려는 ‘만물 이론’을 가리킨다. 그러나 우주의 궁극적 비밀을 탐구했던 천재 과학자 호킹도 일상의 삶에서는 자족적 개인이 아니었고 하나의 공식으로 설명하기도 어려운 존재였다.

호킹은 케임브리지대 물리학 박사 과정이던 21살 때 ‘근위축성 측삭경화증’(루게릭병) 진단을 받았다. 병세는 급속히 악화했다. 의료진이 예상한 여생은 불과 2년. 시한부 판정은 빗나갔지만 43살에는 심각한 폐렴으로 기관지절개술을 받고 목소리를 잃었다.

얼굴 근육 일부와 한 손가락을 빼곤 온몸이 굳어버린 환자. 휠체어에 장착된 컴퓨터 화면을 보며 문장을 만들고 음성 합성기로 말하던 물리학자. 신체를 옥죈 한계를 훌쩍 뛰어넘어 블랙홀과 우주의 기원을 탐구한 지성. 호킹의 가장 강렬한 이미지는 ‘육체에 갇힌 정신’이었다. 그러나 ‘물질을 뛰어넘는 정신’은 오히려 우주를 향해 뻗어 나갔다. 호킹 자신도 말한 적 있다. “장애가 있는 사람이 천문 관측자가 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천체물리학자는 될 수 있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정신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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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킹 주식회사 l 엘렌 미알레 지음, 김연화 옮김, 동녘사이언스, 2만9500원
호킹 주식회사 l 엘렌 미알레 지음, 김연화 옮김, 동녘사이언스, 2만9500원

과학철학자 엘렌 미알레는 ‘호킹 주식회사’(원저는 2012년 출간)에서 이 익숙한 천재의 초상을 뒤집는다. 과학사에 불멸의 족적을 남긴 호킹의 지식 생산은 전적으로 고독한 천재 혼자만의 상상과 지능의 결과일까? 장애에 갇힌 호킹은 일생을 가족과 의료진, 간병인 등의 ‘돌봄 네트워크’에 의존해야 했다. 과학자 호킹은 일상의 의사소통부터 어려운 수학 계산, 논문 작성, 대중 강연까지 도움을 준 조수·학생·동료·출판·미디어 관계자 등 ‘역량의 네트워크’가 있어 가능했다. 여기에는 사람뿐 아니라 컴퓨터와 모니터, 음성합성기가 장착된 휠체어도 큰 몫을 했다. 육체의 한계를 극복하는 모든 도구는 ‘확장된 신체’다. 호킹의 정신은 확장된 신체 위에서 비로소 발현될 수 있었다.

지은이는 이처럼 지식의 집합체적 생산을 가능하게 한 광범위한 연결망에 주목했다. 책 제목 ‘호킹 주식회사’(원제는 Hawking Incorporated)는 스티븐 호킹의 지적 성취가 당사자와 주변의 수많은 행위자가 결합한 결과라는 뜻을 함축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단순히 호킹의 전기가 아니다. 호킹이라는 과학자가 실제로 어떻게 연구하고 생각하고 말할 수 있었는지, 그 과정에서 인간과 기계, 개인과 집단의 경계가 어떻게 뒤섞이고 작동했는지를 살피는 인류학적 보고서다. 원저의 부제가 ‘스티븐 호킹과 앎의 주체에 대한 인류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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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호킹의 삶을 그린 영화 ‘사랑에 대한 모든 것’(2014)의 한 장면. 아름다운 영상미와 호킹 역의 에디 레드메인(오른쪽)의 인상적인 연기가 돋보인 작품이다. UPI 코리아 제공
스티븐 호킹의 삶을 그린 영화 ‘사랑에 대한 모든 것’(2014)의 한 장면. 아름다운 영상미와 호킹 역의 에디 레드메인(오른쪽)의 인상적인 연기가 돋보인 작품이다. UPI 코리아 제공

지은이는 호킹을 ‘혼자 생각하는 천재’에서 인간-비인간을 포함한 ‘연결망 속 행위자’로 재조명한다. 한 사람의 지식과 행위가 실제 세계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과 사물에 의존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려 “하나의 극단적 사례인 호킹을 선택”했다. 호킹은 물론, 그의 보조자, 간호사, 대학원생들, 동료, 물리학자, 언론인, 영화제작자, 기록 보관자, 예술가, 장애인을 위한 컴퓨터 프로그램과 하드웨어 설계자에 이르기까지 ‘호킹 주식회사’에 지분을 가진 수많은 연결망 행위자와 100회가 넘게 한 인터뷰 기록을 토대로 쓰였다.

미알레가 자신과 인터뷰이들에게 던진 질문의 출발점은 이렇다. “인간과 비인간으로 구성된 집합적 신체들을 고려했을 때, 실제 개인은 어떤 위치를 갖게 되는가?” 지은이 자신이 사사한 브뤼노 라투르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으로 설명할 수도, 도나 해러웨이가 말한 ‘사이보그’에 해당할 수도 있다. 지은이의 관심은 지식 생산의 이분법을 정당화한 근대의 신화를 비판적으로 되짚는 데 있다. 그 이분법은 “합리적 정신을 지닌 서구인과 미개한 타자들, 이론적 지식을 가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 과학 공동체 내에서 거물(천재)들과 보잘것없는 이들, 인간과 비인간, 사람과 기계 사이”의 구별과 위계를 정당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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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호킹을 주식회사로 은유한 ‘호킹’(책에서는 고딕체로 구별)은 이런 이분법을 허물고 앎의 주체가 누구인지, 과학 이론은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사람·사물·기술로 짜인 연결망을 통해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그렇게 호킹은 ‘호킹’과 완벽하게 동기화된다. 1999년 7월, 호킹은 독일 포츠담에서 열린 끈이론 학회의 강연을 가벼운 유머로 열었다. “이 강연은 컴퓨터와 음성 합성기를 사용해 진행합니다. 억양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저는 이 목소리와 저를 동일시하게 되었습니다.”(웃음) 기자회견에서는 대학원생 조교가 기자들의 질문을 취합해 사전 검토한 뒤 15개 질문을 세가지로 압축했다. 호킹은 조교가 하나씩 읽어주는 질문에 컴퓨터의 도움을 받아 기계음으로 답변했다.

스티븐 호킹의 연구실. 호킹의 모습을 본뜬 석고상과 칠판에 적힌 수식이 눈에 띈다. ⓒ엘렌 미알레. 동녘사이언스 제공
스티븐 호킹의 연구실. 호킹의 모습을 본뜬 석고상과 칠판에 적힌 수식이 눈에 띈다. ⓒ엘렌 미알레. 동녘사이언스 제공

머릿속 생각을 빼고는 혼자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호킹의 연구에는 제자들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대학원생들은 호킹과 몸짓 언어 소통법을 익히고, 다이어그램을 만들고, 복잡한 수식을 계산했다. 호킹의 사고 실험은 “학생이 매개하는 외재화된 장치에 기반하거나 그에 의해 재활성화”되는 집합적인 사고실험이었다.

만일 ‘호킹’이 하나의 법인이자 조직, 하나의 집합체, 하나의 행위자-네트워크, 하나의 사이보그라면, 이는 곧 주체(개인)의 소멸을 의미하는 걸까? 미알레는 그렇지 않다고 단언한다. “호킹이 가장 고유한 존재인 것은 그가 사회적이고 물질적인 세계 바깥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가장 물질화되고 가장 집합체화되며 가장 분산되어 있고 가장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은이의 표현에 따르면 호킹이야말로 “분산되고-중앙화된 주체”의 전형이다.

과학기술학 연구자인 옮긴이는 “이 책은 호킹을 설명하는 책이라기보다, 우리가 과학과 인간, 몸과 지식, 개인과 집단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다시 묻게 만든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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