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령 작가 "'손절'의 시대…관계의 울퉁불퉁한 단면 관찰"

두번째 소설집 '대부호' 펴내…인간관계 불안 파고든 8편 수록
"서스펜스 의식하진 않아…이야기 끝까지 끌고 가는 힘 있어야"
계급·세대 간 갈등도 압축적으로 다뤄…"사회구조도 함께 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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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모레.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김기훈 기자 = 소설가 성혜령(37)의 작품 세계는 어딘가 불안하고 불편하다.
그 불안과 불편은 거대한 악이나 극단적 사건에서 오지 않는다.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하는 가족, 친구, 연인, 동료처럼 매일 마주치는 익숙한 사람들의 낯선 얼굴에서 피어오른다. 지금껏 미소를 짓던 얼굴이 눈빛 하나로 서늘하게 바뀌는 순간을 작가는 예리하게 포착해낸다.
밀도 높은 서스펜스와 현대 사회에 대한 통찰을 담은 시선으로 주목받는 성혜령이 두 번째 소설집 '대부호'(문학동네 펴냄)를 선보였다. 첫 소설집 '버섯 농장' 이후 2년 만이다.
성혜령의 작품을 딱히 어떤 장르로 규정하긴 어렵지만, 서스펜스는 그의 작품을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단어가 됐다.
새 책에는 인간관계의 불가해함에서 비롯되는 불안과 공포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렸다.
하지만 정작 성혜령은 연합뉴스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서스펜스'라는 단어를 등단작 심사평에서 듣고, 검색해봤던 기억이 난다(웃음)"며 서스펜스를 의식하며 쓴 이야기는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단지 독자를 이야기의 끝까지 끌고 가는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일 뿐이다.
수록작 가운데 가장 숨 막히는 결말로 얼얼한 충격을 안기는 작품은 '나방파리'다.
작품의 화자인 일영은 한때 친한 벗이었던 종희 언니의 어린 아들이 죽었단 부고를 받는다.
아들을 잃은 종희는 죽은 사람과 소통할 수 있다는 영매들을 찾아다니고, 그 과정에 일영이 동행한다.
그리고 종희는 과거 자신이 화장실에서 손끝으로 짓이겨 죽였던 무수한 나방파리를 떠올리며, 무심한 살생의 대가를 치르는 것은 아닐까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이야기가 흐를수록 두 사람 사이의 오해와 불신이 드러난다.
과거 편입학원에서 만난 두 사람은 서로의 힘든 처지를 이해하며 급격히 가까워지지만, 어느 순간 종희가 일영의 고통을 '가짜'로 치부하면서 둘의 관계는 틀어진다. 또 일영의 어떤 행동이 종희에게 닥친 불행의 씨앗이 됐단 사실이 드러나며 이야기는 파국으로 흐른다.
작가는 이처럼 친밀감으로 포장된 관계가 허물어지고 '민낯'이 까발려지는 순간을 그려낸다.
성혜령은 "관계란 굉장히 유기적인 것이고, 끊임없이 어떤 호감이나 애정을 주고받지 않으면 멀어지게 된다"면서도 "너무 가까워지면, '나방파리'에 나온 인물들처럼 서로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 버리는 순간도 오기 마련"이라고 인간관계의 속성을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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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그는 "어떤 관계든 '손절'할 수 있는 시대에, 관계의 울퉁불퉁한 단면들, 복잡한 감정의 작용을 들여다보는 일은 작가로서 무척 흥미로운 것 같다"고 말했다.
'나방파리'가 인간관계의 본질적인 속성을 파고든다면, 표제작인 '대부호'는 '사회 소설'로서의 면모가 좀 더 두드러진 작품이다.
작품은 가족을 잃은 뒤 서로 다른 세계관을 갖게 된 엄마와 딸이 다시 한집에 머물게 되면서, 가족 안에 쌓인 원망과 상처, 정치·이념적 갈등을 들여다본다.
화물차를 몰던 아빠는 휴게소에서 잠을 자던 중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고, 오빠는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냉동창고에 갇혀 숨졌다. 특히 오빠의 죽음 이후로 엄마와 딸은 서로가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딸은 오빠를 죽게 만든 노동 환경과 사회 시스템에 분노하지만, 엄마는 정치 유튜브 방송을 들으며 이른바 '태극기 집회'에 나간다. 간극은 좁혀지지 않고, 딸은 엄마를 떠나려 발버둥 친다.
하지만 '대부호'는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대상을 끝내 이해해보려는 몸부림이 느껴지는 작품이기도 하다.
"뭔가 바꾼다고 말하는 사람들, 엄마는 꼴 보기 싫더라. 노동자, 인권, 그런 말 하는 사람들, 진짜 싫어. 바꿀 수 있었으면, 우리 현식이가 안 죽어도 됐잖아. 그런 생각 하면 엄마는 살 수가 없어." ('대부호' 중에서)
작품의 마지막에서 모녀는 '대부호'라는 카드 게임을 함께하고, 현실에선 뒤집을 수 없는 삶의 질서를 게임에서나마 뒤집으며 서로에 대한 이해를 모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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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성혜령은 "이 소설은 '나방파리'처럼 한 사람이 외로움에 갇혀버리는 결말로 내고 싶지 않았다"며 "아무리 해결할 기미가 안 보이는 문제나 갈등 속에서도, 돌파구랄까, 잠깐 반짝이는 순간 같은 것들이 존재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설득하고 싶기도 했던 것 같다"고 돌아봤다.
'대부호'는 한국 사회의 계급·세대·정치적 분열을 한 가족을 통해 압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작가는 "아무래도 이야기를 쓸 때, 작은 곳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고, 소설은 결국 한 인물을 들여다보는 일이기도 하다"면서도 "그런데 사실 한 사람을 잘 알기 위해서는 결국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사회를 같이 볼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한 사람의 인생은 사회의 구조와 촘촘히 연결돼 있으며, 결국 좋은 소설은 사회 소설적인 면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또 이처럼 사회적 모순과 부조리를 다루면서도 그의 이야기는 어떤 한 방향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대신 무수한 질문을 남긴다.
문학평론가 이소는 이 책의 해설에서 "훌륭한 사회소설은 풀어야 할 매듭을 여럿 남기면서도 결코 수다스럽지 않다. 성혜령의 소설 역시 마찬가지"라며 "사회에 대해 말하면서도 사회만으로는 해명할 수 없는 수수께끼를 남겨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성혜령은 2021년 단편 '윤 소 정'으로 창비신인소설상을 받으며 데뷔했다. 이후 젊은작가상, 이상문학상 우수상, 이효석문학상 우수상 등을 받았다.
낮에는 직장인으로 밤에는 소설가로 '주경야작'(晝耕夜作)을 한다는 그는 "앞으로 조금씩 더 긴 이야기에 도전해보려고 한다"며 "단편 소설 특유의 속도감을 좋아하지만, 독자분들이 더 길게 몰입할 수 있는 이야기를 잘 써보고 싶다"고 했다.
kihun@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6년09월13일 08시11분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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