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은 ‘신의 발냄새’ 속은 ‘비단 같은 크림’···치즈 한 조각에 남은 수도자의 삶
에푸아스 치즈. 위키피디아
믿음이 없어도 이상하게 마음이 고요해지는 순간들. 먹고 마시며 다니다가 마주치는 뜻밖의 성스러움. 거창하지 않아도 일상에 숨어 있는 작고 거룩한 순간들을 만나봅니다.
얼마 전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치즈 팝업매장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프랑스 국립낙농협의회가 프랑스의 다양한 치즈를 맛볼 수 있도록 마련해놓은 자리였습니다. 프랑스는 수백가지 치즈가 있는 것으로 유명하지요. 프로마쥬 블랑부터 브리, 콩테 등 프랑스의 대표적인 치즈들을 맛볼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이런저런 치즈의 냄새를 맡고 맛을 보는데 묘하게 코끝을 자극하는 것이 있었어요. 그쪽을 따라갔더니 놓여 있는 것은 ‘랑그르’ 치즈였습니다. 랑그르는 다양한 치즈의 종류 중 하나인 ‘세척치즈’에 속합니다. 세척치즈는 치즈의 겉을 씻어가며 숙성시킨 치즈입니다. 소금물이나 술을 사용해 치즈의 표면을 닦아주면서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해요. 겉면을 씻어낸다는 것이 냄새를 없애준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치즈 표면의 미생물이 습기와 염분을 만나면서 더 활성화되어 특유의 강렬한 향을 만들어 냅니다. 동시에 치즈 내부는 부드럽게 숙성되지요. 그래서 냄새는 코를 움찔하게 할만큼 지독한데 한 조각 입에 넣어보면 부드럽고 진한 우유의 풍미가 크림처럼 녹아내리는 묘한 반전을 선사합니다.
세척치즈 중에서도 특히 강렬한 냄새를 자랑하는 것으로는 ‘에푸아스’ 치즈가 있습니다. 이 치즈에는 ‘신의 발냄새’라는 별명이 붙어 있을 정도랍니다. 이 때문에 이 치즈를 가지고 파리에서 지하철을 탈 수 없다는 유명한 도시괴담도 있었지요. 물론 사실은 아니지만 그만큼 냄새가 강렬하다는 의미인 셈이겠지요. 냄새의 소문만으로 편견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오렌지빛깔의 껍질에선 놀랄만한 냄새가 나지만 꾸덕한 크림처럼 흘러내리는 노르스름한 치즈 속은 구름으로 짠 비단같은 느낌이랄까요.
프랑스치즈 전문 브랜드 르므니에 유관문 대표에게서 세척치즈와 관련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세척치즈는 중세 수도원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중세시대 서양사회를 지배했던 것은 종교였습니다. 당시 종교적 규율은 식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수도자들에게 고기는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6세기 무렵 만들어진 ‘성 베네딕도 규칙’에는 매우 허약한 병자를 제외하고는 네 발 달린 동물의 고기를 먹지 말라는 규정이 있었습니다. 그런 생활 속에서 고기를 먹는 듯한 짙고 구수한 풍미의 치즈가 발달했다는 것이지요. 에푸아스 치즈의 기원을 설명하는 자료에도 16세기 시토회 수도자들이 금육일에 먹을 음식으로 이 치즈를 만들었고 이후 제조법이 주변 농가로 퍼졌다는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듣고 보면 꽤 흥미로우면서 짠한 마음도 듭니다. 먹지 못하는 음식에 대한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비슷한 냄새가 나는 무언가로 이를 달랬다는 것이니까요. 다만 여기에는 사실과 이야기가 조금씩 겹쳐 있습니다. 수도자들의 고기 섭취 제한 규칙이나 에푸아스가 수도원 공동체에서 비롯됐다는 것은 공식적인 치즈 역사에 전해집니다. 하지만 ‘일부러 고기 냄새를 내기 위해’ 치즈의 겉을 씻기 시작했다는 식의 제작 동기까지 입증해주는 기록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수도원의 금육문화와 세척치즈 특유의 풍미가 만나면서 생겨난, 오랫동안 전해진 이야기 정도로 받아들이는 편이 좋겠습니다.
앞서 언급한 ‘랑그르’ 치즈는 18세기 중반 프랑스 북동부 랑그르 지방 일대 농가에서 만들어 팔던 치즈였였습니다. 랑그르 치즈 협회에 따르면 18세기 중반 랑그르의 한 도미니코회 수도원장이 이 지역 치즈를 찬양하는 노래를 지었다고 전해집니다.
중세의 수도원은 기도와 수행만 하는 장소는 아니었습니다. 특히 시토회 수도원들은 농지를 경작하고 가축을 기르는 큰 농장을 운영했습니다. 치즈와 농산물을 인근 지역에 내다팔기도 했고 다양한 식품 생산시설도 갖췄지요. 오늘날 식으로 표현한다면 기술과 생산 지식이 축적되는 일종의 R&D 센터이기도 했습니다. 치즈를 비롯해 와인이나 맥주 등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식료품들이 수도원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이유이지요.
이탈리아 음식을 먹을 때 많이 접하게 되는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 치즈도 중세 수도원의 역사와 맞닿아 있습니다. 수도원 농장에서 나오는 우유를 어떻게 오래 보관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던 수도자들은 우유를 수분이 적은 치즈로 만들었습니다. 오래 두어도 상하지 않고 먼 곳으로 옮기기도 좋았습니다. 비슷한 경성치즈인 그라나 파다노의 기원에도 수도원이 등장합니다. 그라나 파다노 보호협회는 12세기 밀라노 남쪽 시토회 수도원의 수도자들이 우유를 오래 보관하기 위해 단단한 치즈를 만든데서 그 역사가 시작됐다고 설명합니다.
수도원과 치즈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눈길이 가는 곳은 그곳에서 살았던 수도자들의 삶입니다. 고기를 절제해야 했던 식탁에서 매일 짜낸 우유를 버리지 않아야 했으며 냉장시설이 없던 시절에 음식을 오래 보관할 방법도 찾아야 했습니다. 기도하고 일하며 자급자족했던 수도자들의 하루하루 속에 그런 필요와 궁리가 쌓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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