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는 남의 일? 아직 나의 일이 아닐 뿐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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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처음 독일에 갔을 때 ‘아, 여기는 선진국이구나’ 하고 느낀 순간이 두번 있었다. 하나는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에 도서관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다른 하나는 몸이 불편한 사람을 대하는 태도였다. 전동 휠체어와 경사로가 낯설지 않았고, 휠체어를 탄 사람이 버스에 오르려 하면 기사와 승객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나서서 도왔다. 누구도 호들갑을 떨지 않았다. 필요한 사람이 있으니 돕는다는 듯했다. 나는 그 풍경에서 선진국 시민의 품격을 보았다. 10년쯤 뒤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는 우리나라도 제법 그 반열에 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그때까지 장애는 내게 남의 일이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슬슬 내 일이 되어가고 있다. 몇해 전 아내가 발목이 골절돼 한동안 휠체어를 타야 했다. 그해 한글날, 휠체어를 끌고 호수공원에 산책하러 나갔다가 깜짝 놀랐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턱과 경사, 좁은 통로가 줄줄이 나타났다. 걷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몇센티미터가 휠체어에는 벽이었다. 더 놀라운 일은 따로 있었다. 평소에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는데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우리 동네에 그렇게 많았다. 사람들이 갑자기 늘어난 게 아니다. 내가 이제야 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날부터 장애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하게 됐다. 아내의 다친 발목에 있었을까. 휠체어에 있었을까. 아니면 휠체어 한대 지나가기 어렵게 만들어놓은 길에 있었을까. 몸은 그대로인데 경사로 하나가 생기면 갈 수 있는 곳이 늘어난다.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면 어제 갈 수 있던 곳도 오늘은 갈 수 없다. 장애는 분명 몸과 관련된 일이지만 몸만 들여다봐서는 설명되지 않았다. 김승섭의 책을 읽으며 내가 호수공원에서 품었던 의문이 그만의 것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그는 오랫동안 질병과 장애를 개인의 몸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와 함께 연구해온 사회역학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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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몸이 세계라면’이라는 제목은 그래서 절묘하다. 어떤 병에 걸리고 얼마나 아프며 얼마나 오래 사는지는 유전자나 생활습관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떤 집에 사는지, 차별을 받는지, 병원과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지에 따라서도 몸은 달라진다. 사회에서 겪은 일이 몸에 흔적을 남긴다. 몸은 한 사람의 것이지만 그 몸을 만드는 데는 세상도 한몫한다. 장애라고 다를 까닭이 없다.
‘우리의 상처가 미래를 바꿀 수 있을까’에서는 코로나19를 겪은 여성, 아동, 장애인,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민을 살핀다. 김승섭 혼자 쓴 책은 아니다. 여섯명의 연구자가 각자의 현장을 맡았다. 우리는 코로나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실제 피해는 고르게 돌아가지 않았다. 평소에도 돌봄과 이동, 노동과 의료에서 불리했던 사람들은 팬데믹 때 더 큰 어려움을 겪었다. 같은 비가 내려도 평지의 집과 반지하의 집이 같은 피해를 입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재난은 없던 불평등을 만드는 것 못지않게 원래 있던 불평등을 들춰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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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간다. 남의 아픔을 알아차리는 것과 그 아픔에 응답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아픈 사람에게 “힘내세요”라고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왜 어떤 사람은 더 자주 아픈지, 왜 어떤 사람의 아픔은 조사와 통계에서조차 잘 잡히지 않는지 알아내려면 연구가 필요하다. 김승섭이 하는 일이 바로 그런 공부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연민에는 공부가 없어도 된다. 하지만 제대로 응답하려면 공부해야 한다. 좋은 뜻만으로는 턱을 없앨 수 없고 버스의 구조를 바꿀 수도 없다.
여기까지 읽고 나면 킴 닐슨의 ‘장애의 역사’가 궁금해진다. 김승섭이 쓴 책이 아니라 그가 번역한 책이다. 그런데 앞의 책들과 한 책꽂이에 놓았을 때 잘 어울린다. 장애가 언제 어디서나 똑같은 뜻을 가진 말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시대마다 ‘정상적인 몸’을 정하는 기준은 달랐고 노동과 전쟁, 교육과 복지 제도가 달라질 때마다 장애인을 대하는 방식도 달라졌다. 결국 장애의 역사를 읽는 일은 누가 시민으로 인정받았고 누가 바깥으로 밀려났는지를 읽는 일이기도 하다. 같은 몸으로도 어떤 사회에서는 얼마든지 돌아다니며 일하고 공부할 수 있지만, 다른 사회에서는 집 밖에 나오는 것부터 큰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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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에 관한 책을 읽다 보면 오히려 비장애인이 만들어놓은 세상이 눈에 들어온다. 계단과 버스, 화장실과 학교, 일터가 새롭게 보인다. 김도현의 ‘장애학의 도전’, 김원영의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초엽과 김원영의 ‘사이보그가 되다’도 옆에 꽂아두어야 한다. 각각 사회와 법, 과학기술을 통해 우리가 장애라고 부르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묻게 하는 책이다. 그러고 보면 장애는 일부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다. 몸을 가지고 늙어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언젠가는 만나게 될 문제다.
아내의 휠체어를 밀고 호수공원을 다녀온 뒤 나는 같은 길을 예전처럼 보지 못한다. 턱이 보이고 경사로가 보이고 엘리베이터의 위치가 보인다. 무엇보다 그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전까지 나는 경사로를 ‘편의시설’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밖으로 나갈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르는 시설이라는 걸 안다.
1992년 독일에서 내가 감탄했던 것도 어쩌면 전동 휠체어나 경사로 자체가 아니었을 것이다. 오늘 잘 걷는 사람도 내일 사고를 당할 수 있고, 누구나 늙으며, 어느 순간 남의 도움이 필요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별일 아닌 듯 받아들이는 사회의 태도였을 것이다. 장애는 남의 일이 아니다. 아직 내 일이 아닐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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