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송의 아니 근데]‘생명권 대 자기결정권’ 프레임은 진부···여성에 다양한 서사를 허하라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의 고등학생 커플 ‘영주’(노윤서)와 ‘현’(배현성). 드라마는 임신중단한 여성을 ‘죄인’으로 만드는 대사와 장면들로 논란이 됐다. tvN 제공
지난 9월16일, 정부가 임신중지 의약품 도입을 공식화했다. 2019년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이렇다 할 진전이나 변화 없이 이어진 공백이 7년 만에 깨진 것이다. 통칭 ‘미프진’으로 불리는 경구용 임신 중지 약물(이하 ‘미프진’)은 2026년 기준 전 세계 101개국에서 합법이며, 세계보건기구(WHO)도 임신중지 약물 사용을 통해 사망 사고나 질병 감염을 막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도 한국에서는 행정적 무관심과 문화적 반발에 부딪혀 도입이 지지부진했다. 그동안 온라인에서 가짜인지 진짜인지 알 수 없는 미프진을 구매한 이들은 고스란히 위험에 노출되었다. <우리들의 블루스>(2022)에는 고등학생 커플이 온라인에서 미프진을 구매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기간도 지난 데다 가짜일 확률이 높아 이들은 결국 약을 쓰지 못한다. 독립영화 <지우러 가는 길>(2025)에서 담임교사 종성과 비밀 연애를 하던 고등학생 윤지는 임신한 뒤 종성이 사라지자, 임신중단을 결심한다. 불법인 미프진을 사려고 룸메이트 경선의 돈을 훔치고, 낙태 수술을 받으려고 동물병원까지 가는 윤지의 위태로운 여정을 경선이 쫓는다. 위민온웹(Women on Web)은 WHO의 지침에 따라 안전한 임신 중지 및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국제 비영리 단체로, 기부금을 내면 미프진을 우편으로 보내준다. 수천 명의 한국 여성이 위민온웹의 도움을 받았다. 이제 2027년 상반기부터 한국에서도 약물로 안전하게 임신을 중단할 수 있다.
미프진 도입은 2025년부터 성평등가족부가 차근차근 추진해 왔으며, 7월 대통령의 적극적인 권고로 급물살을 탔다. 수술보다 덜 위험하고 덜 부담스러운 형태로 여성이 임신과 출산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은 혁명적이다. 그런데 정부의 미프진 정식 도입 발표 직후 종교계에서 “임신중지약은 살인”이라며 반발했다. 역사와 전통이 있는, 달리 말하면 진부한 레토릭이다. 원치 않는 임신을 걱정할 필요 없는 몸들은 언제나 이 문제를 ‘생명권 경시’의 차원, 즉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생명권의 대립으로 끌고 간다. 더 나은 논의와 새로운 생명 존중은 어떻게 가능할까? 오늘은 낙태죄의 역사부터 미프진 도입까지의 역사를 간략하게 훑어보고, 그 마디마디에 출몰하는 작품을 검토하며 그 경로를 탐색하고자 한다. 과거 자료를 참고하는 과정에서 편의상 낙태와 임신중단이라는 표현을 혼용한다.
2017년 11월19일 서울 중구 정동길에서 ‘여성단체 페미당당’ 회원들이 약물을 사용한 임신중단을 촉구하고 먹는 낙태 유도약인 ‘미프진’의 국내 도입을 요구하는 뜻으로 ‘낙태약 자판기 설치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국가가 임신중단을 처벌하기 시작한 것은 1912년, 일본 형법을 조선에 적용하여 시행된 ‘조선 형사령’이 시초다. 처벌 대상은 여성과 의사다. 조선시대까지는 상해로 인해 임신이 중단될 경우 상해를 입힌 가해자를 처벌했으나 임신을 중단한 여성을 처벌하는 법은 따로 없었다. 임신을 중단할 수 있는 의료적 기술이 없기도 했고, 아이를 낳는 것이 여성의 운명인 양 여겨지는 시대라 이 문제 자체가 유의미하게 포착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문화권에서나 원치 않는 임신을 하는 여성은 존재했고 이를 막으려는 치열하고 고통스러운 분투가 있었으나 국가가 임신중단을 처벌할 권리를 공식화한 것은 근대부터다. 해방 뒤 독자적인 법체계를 갖추는 과정을 거쳤음에도 1953년 편찬된 형법에는 낙태죄 조항이 유지되었으며, 여전히 여성과 의료진만을 처벌의 대상으로 삼았다.
1973년 제정된 모자보건법에서는 낙태를 제한적으로 허용했다. “정신장애나 신체질환,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강간에 의한 임신, 혈족 또는 인척간의 임신, 엄마의 건강을 해하거나 해할 우려가 있는 경우”에는 ‘합법적으로’ 낙태를 할 수 있었다. 이 법안 또한 일본의 ‘우생보호법’을 따른 것으로, ‘국가가 건강하고 정상적인 국민을 보유할 권리’와 피치 못할 피해를 구제하는 데에만 초점이 맞춰졌다. 대대적인 산아제한 정책이 펼쳐진 1960년대 중반부터는 낙태는 묵인되었을 뿐 아니라 정부 차원에서 은밀하게 권장했다. 정부는 임신 초기 낙태를 무료로 해주는 ‘월경조절술 사업’에 비용을 지원하고, 농촌을 중심으로 영구피임 시술과 낙태 수술을 진행한 ‘낙태 버스’를 운영하기도 했다. 수신지 작가의 만화 <곤Gone>(2019)에는 과거 한 번이라도 낙태 경험이 있었다면 여성을 처벌하는 가상의 세계관이 등장한다. 법이 제정되었을 때부터의 ‘범법자’를 공소시효 없이 처벌하겠다는 정책 아래 중노년 여성들까지 줄줄이 적발된다. 수십 년이 지나서 갑자기 감옥에 가게 된 중노년 여성들은 “나중에 문제가 될까 봐 보건소에서 했는데”, “옛날에는 그게 흔한 일이었어. 흉도 아니었다니까”라며 당황한다. 실제로 낙태는 ‘몸을 함부로 굴린 젊은 여자’의 만행이라는 이미지와 달리 2000년대 초반까지 기혼 여성의 비율이 훨씬 높았다.
드라마 <M>에 출연한 심은하의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조금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모를 수가 없다. 피임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고, 피임에 대한 인식도 열악하던 시절에 어떻게 일곱, 여덟씩 낳던 아이들을 갑자기 단기간에 ‘최대 두 명’ 정도로만 낳았겠는가. 더군다나 뿌리 깊은 남아선호사상은 그대로인데, 적게 낳으라고 종용하니 결국 성별 감별 낙태가 대대적으로 유행했다. 1980년대 후반, 적당히 인구 조절이 이루어지자 낙태를 대하는 태도가 다시 변화한다. 1987년부터 정부는 태아의 성별을 알려주는 것을 금지하며 법률을 강화했다. 1994년 MBC에서 방영한 드라마 <M>은 지금까지 회자하는 납량 특집인데, 낙태된 태아의 영혼이 주인공의 몸에 빙의해서 피의 복수를 감행하는 이야기다. 어린 시절 공포에 질려 봤던 기억이 생생하며, 낙태는 나쁜 것이라는 문화적 감각을 많은 이들의 의식에 새긴 작품이다. 이 무렵부터 도시 괴담에는 소위 말하는 ‘태아령’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초음파 기술 발달로 뱃속의 아이 형상을 시각적으로 볼 수 있게 되고, 뱃속의 아이가 수술 도구를 피해 도망 다니는 자극적이고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영상이 떠도는 인터넷 환경도 막연한 거부감과 임신중단 경험이 있는 여성을 향한 적의에 기여했다.
에리카 밀러는 임신중지 서사에 특정한 ‘감정 각본’이 있다고 지적한다. 감정 각본은 한 사회의 ‘상식적인 감정’을 규정하는 일관된 내러티브로, 어떤 일을 어떻게 경험하는지에 대한 문화적 기대로 형성된다. 지배적인 임신중지 감정 각본에는 슬픔‧죄책감‧수치심 등의 부정적인 감정이 중심이며, 이는 결과적으로 반反 임신중지 정서를 심는다. 미디어에서 임신중단을 한 후 고통과 수치심을 느끼거나, 심장소리를 듣고 죄책감을 느낀 후 생명을 받아들이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특정한 감정 각본의 반영이다. 임신중단에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지 않으면 비정하고 잔인한 여자로 몰아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에리카 밀러에 따르면 어떤 임신중지에는 안도‧감사‧희망 등의 긍정적 감정이 따르기도 한다.(박다솜, ‘임신중지 서사의 감정각본 다각화-2019년 낙태헌법불합치 판결 이후의 한국소설을 중심으로’, <한국여성문학회>, 2024, 83-86쪽)
수신지 작가의 <곤>의 한 장면. 수신지 인스타그램
수신지 작가의 <곤>의 한 장면. 수신지 인스타그램
수신지 작가의 <곤>에서 스무살의 나샛별은 임신중절을 하러 갔다가, 수술 직전에 아이가 이미 자연 유산되었다는 사실을 안다. 이런 경우에는 감옥에 가지 않고 수술비도 대부분 돌려받는다는 말에 샛별은 몹시 안도하며 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그리고 미련 없이 자신의 삶을 살러 간다. 2024년 개봉한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은 박상영 작가의 연작소설 중 한 편인 ‘재희’가 원작이다. 극 중 재희는 임신중단을 하러 병원에 갔다가 여성의 순결을 운운하는 의사에게 반발하여 자궁 모형을 훔쳐 달아나고, 무사히 수술이 끝난 것에 안도한다. 재희는 그 뒤로도 자유롭게 살다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도 한다. 영화 <자, 이제 댄스타임>(2014)은 임신중단 경험이 있는 여성들이 오랜 금기를 깨고 카메라 앞에 자신을 드러내는 다큐멘터리다. 한 출연자는 말한다. “그때의 나를 사랑해주고 싶어서, 이 인터뷰를 하고 싶었어요.” 그렇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임신중단을 한 여자도 그 순간과 그 이후에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 임신중단을 둘러싼 윤리적 기준과 문화적 감수성을 재편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다양한 감정 각본과 서사가 필요하다.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의 ‘재희’(김고은)는 임신중단을 위해 병원을 찾았다가 의사로부터 ‘순결’을 지키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는다. 쇼박스 제공
지금 임신중단을 둘러싼 논의를 생명권과 자기결정권의 대립에 가두는 것은 소모적이고 무의미하다. 근본적인 문제 제기는 무엇이 ‘원치 않는 임신’을 만드느냐, 국가가 개인의 몸에 일어나는 일을 처벌할 수 있느냐로 향해야 한다. 성폭력, 빈약한 성교육과 피임 실천률, 여성의 임신과 출산을 멸시하는 문화에서 임신중단을 죄악시하는 방법으로는 생명을 ‘중시’할 수 없다. 여성의 생명을 경시하는 쾌감을 포기하지 못하겠다고 한다면 차라리 솔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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