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핑크 듣는다고 황석영 읽나요”…한국문학에 필요한 ‘번역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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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이란 무엇인가. 사전적 의미는 ‘어떤 언어로 된 글을 다른 언어의 글로 옮김’(표준국어대사전)이다. 그러나 문학 작품을 번역하는 일은 단순히 언어의 변환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언어라는 기표에 담긴 의미의 맥락과 정서, 단어와 문장이 품은 섬세한 뉘앙스까지 고스란히 재생하는 일, 말이 달라 뜻이 통하지 않는 서로 다른 세계를 하나로 포개는 거울일 테다. 텍스트의 번역이 말의 통역과 다른 이유다.
한글날 제정 100돌을 하루 앞둔 8일 오후, 인천 송도국제도시에 있는 국립세계문자박물관(관장 김명인, 이하 국문박) 강당에는 특별한 학술 대담이 열렸다. ‘번역, 이주하는 텍스트’라는 주제의 국제 콜로키움이었다.
한국 현대문학의 거장 황석영 작가와 문학평론가 김명인 인하대 명예교수(국문박 관장),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영어로 옮긴 영국의 번역가 데보라 스미스와 정보라 작가의 ‘저주 토끼’를 영어로 옮긴 번역가 안톤 허가 잇달아 자신의 작품 세계와 재창작으로서의 번역에 대한 생각을 서로, 그리고 청중과 함께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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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이날은 올해 2026년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가 발표된 날이기도 했다. 올해 수상의 영예는 영어권 문학가인 캐나다 시인 앤 카슨에 돌아갔다. 그러나 앞서 2024년 10월 한강 작가가 한국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는 영예를 누린 데에는 데보라의 섬세한 한-영 번역이 큰 몫을 했다.

이날 콜로키움은 1부 ‘황석영 작가·김명인 관장이 되짚는 한국문학 50년’, 2부 ‘데보라 스미스·안톤 허가 말하는 ‘번역이라는 재창작’’으로 나뉘어 진행됐다.(이하 호칭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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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은 꼭 2년 전 이즈음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의 의미를 짚는 한겨레 기고에서 ‘황석영 소설은 낡았다’고 썼던 일화를 꺼내 들며 리얼리즘 문학과 포스트 모던 문학의 차이와 구실에 대한 질문으로 대담을 시작했다. 기고의 해당 대목은 이렇다. “황석영이 오랫동안 한국 소설의 성취와 위엄을 대표해 온 대작가로서 한국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자격을 갖추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황석영은 한강에 비해 분명히 낡았다.”
황석영이 “이런 괘씸한 이야기를 난 모르고 있었네?”라며 말문을 열자 청중석에서 폭소가 터졌다. 황석영(83)과 김명인은 15살 나이 차이를 뛰어넘는 40년지기로, 품격 있되 허물없는 농을 주고받을 만큼 가까운 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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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은 “한강의 소설은 국가의 폭력, 한 시대의 폭력에 상처받은 영혼들을 치유하는 역할을 했죠, 앞세대는 싸우느라고 바빴어(청중 웃음). 한강은 그들까지 치유하는 역할을 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한강은 한국 문단의 ‘안티고네’지요”라고 말했다.
황석영은 일제 강점 말기인 1943년 만주에서 태어나, 해방 뒤 외가인 평양을 거쳐 남한으로 내려와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1980년 5월 이재의(당시 전남대 복학생)가 광주항쟁의 진상을 기록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원고를 정리해 출간하는 등 사회운동에도 활발히 참여했다. 1989년 북한 조선문학예술총동맹의 초청으로 방북했다가 귀국하지 못하고 독일과 미국에 체류하다가 1993년 귀국해 옥살이를 한 뒤 풀려났다. 그 뒤로도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거주했다.

김명인은 “왜 그리 평생 떠도는 삶을 사셨는지, 그 삶과 문학세계가 어떤 관련이 있는지” 물었다. 황석영은 “이야기꾼에는 두가지가 있다. 토박이 이야기꾼과 외방 이야기꾼. 토박이 이야기꾼은 고향에 안주하면서 그곳에 전해오는 이야기라든가 개개인이 가진 서사를 전승하는 역할을 한다. 외방 이야기꾼은 바깥으로 나가 떠돌아다니면서 경험한 이야기를 과장도 하고 허풍을 섞어가며 바깥소식을 전한다”라며 자신은 천상 외방 이야기꾼이라고 했다.
황석영은 “18세기 독일의 괴테가 세계문학을 이야기했을 때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는 없었다. 그것이 유럽식 보편주의이자 권력의 레토릭이기도 하다”고 짚었다. 그는 “물론 유럽식 가치관에도 인권이라든가 좋은 게 많은데 그게 제국주의와 같이 왔을 때 토박이성이 억제·말살·변형된다”며, “그에 대한 자각들이 생기면 또 다른 세계가 열린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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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라틴아메리카 문학이 유럽 문학에 준 충격이랄까 수혈이 있어요. 라틴 아메리카 문학은 아즈텍과 잉카 문명을 깔고 있는데, 스페인어로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통치하고 억압하고 했던 ‘적의 언어’를 가지게 되는 거죠. 이게 재미있는 게, ‘적의 언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라틴아메리카 토착의) 새롭고 신령하고 힘 있는 서사가 통째로 훼손 없이 유럽에 전달될 수가 있었던 거죠. 현대 세계에서 토박이 이야기꾼보다는 외방 이야기꾼이 훨씬 더 유리한 처지가 된 거지요.”
황석영은 이 대목에서 “지금 처음 밝히는 건데, ‘할매’의 후속작으로 ‘우렁각시’라는 소설을 쓰고 있어요. 이래서 평론가들을 조심해야 해”라고 밝혀 또다시 청중의 폭소를 자아냈다. ‘우렁각시’는 청소대행업체, 그러니까 파출부 용역 사무실의 명칭이라고 했다.

김명인은 “황석영의 ‘바리데기’(2007), ‘개밥바라기별’(2014), ‘할매’(2026)까지 최근 20년 새 작품들에서 영매적 능력을 지닌 인물이 등장하고 서사의 지평이 비약적으로 넓어졌다. 리얼리즘의 심화 확장으로 볼 수도 있고 우리 고유의 무속적 전통을 창조적으로 되살린 것일 수도 있다”고 평했다.
이에 대해 황석영은 “평론가들이 이를 ‘민담 리얼리즘’이라고 이름 붙이더라”며, 라틴아메리카의 ‘환상적 리얼리즘’과 비교해 차이점을 설명했다. 예컨대,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작품들은 한편으로는 초현실주의의 영향이 있고 라틴아메리카 고유의 문명과 원색적 요소들이 스페인어와 접합됐지만, 그들에게는 불러올 과거가 모두 말살되고 없다고 말했다. “불러올 과거가 없는 서사는 신화적이고, 예술적으로는 훨씬 멋져 보이지만 (문학적) 힘은 (말살된 과거에) 흡수”돼버린 측면이 있다는 이야기다.
황석영은 그러나 “우리에게는 불러올 과거가 너무나 선명하게 남아 있다. 3~4대가 한집에 살면 처음 듣는 (과거사) 이야기가 줄줄 전해지는데, 거기에 가치를 부여하면 그게 역사가 된다”며 “지금까지 황석영 리얼리즘은 민담 리얼리즘을 형성하기 위한 과정으로 봐달라”고 말했다.
최근작 ‘할매’는 전북 군산 하제마을의 수호신 당산나무인 600살 팽나무를 모티프로 역사와 생명을 이야기한다. 황석영은 “우리 무속은 ‘기억하라, 기억하라, 기억하라’고 끝까지 밀어붙인다. 죽은 자들까지도 불러내 기억을 끄집어낸다. 그렇게 진실을 밝히고 나면 용서하고, 같이 살자고 한다. 그게 바로 ‘해원 상생’이다”고 강조했다.

이어진 2부에서는 데보라 스미스와 안톤 허가 최미경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 교수(불어불문학)의 사회로 대담했다. 한국 문학의 세계화, 번역가의 눈으로 본 한국 문학, 문장을 옮기며 마주한 선택의 순간 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왔다.
데보라는 한강의 ‘채식주의자’(2007), ‘희랍어 시간’(2011), ‘소년이 온다’(2014) 등을 영어로 옮겼는데, 특히 ‘채식주의자’는 2016년 한국인 작품으로는 최초로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현 부커상)을 수상하며 8년 뒤 한강의 노벨상 수상의 길을 다졌다. 안톤 허가 영역한 박상영 소설 ‘대도시의 사랑법’(2019)도 2022년 부커상 후보작에 올랐다.
데보라는 2020년 이후 6년 만에 한국을 찾았는데, ‘김보라’라는 한국 이름도 갖고 있다. 보라는 자신의 본명 데보라에서 따왔고, 성씨는 스미스가 영국에서 가장 흔한 성씨여서 그에 해당하는 김씨를 선택했다.
안톤 허는 “저를 한국계 재외동포로 오해하는 분들이 많은데, 저는 한국에서 나고 자란 데다 심지어 국가유공자로 가장 한국적인 사람”(청중 웃음)이라며, 외국 출판사와 접촉이 많은 번역가의 특성과 필명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그는 박상영 소설 ‘대도시의 사랑법’ 영어판을 데보라가 설립한 비영리 번역출판사 ‘틸티드 액시스 프레스(Tilted Axis Press)'에서 출간한 인연이 있다.
데보라는 “안톤 허의 영어 번역이 생동감이 있어 인상적이었고 출판인이 쉽게 에디팅할 수 있어 좋았다”고 돌이켰다. 안톤 허는 “영미권 편집자 중 한국어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데보라는 한국어에 대한 이해가 높아 영어 단어의 선택까지 섬세하게 도와주었다. 번역자에게 상당한 자유와 예술성을 펼칠 기회를 주는 편집자”라고 화답했다.

한국 문학의 국제적 위상 변화에 대해 안톤 허는 “지난 일이십년 동안 한국문학 번역가들이 그 기반을 다져왔다. 한강과 데보라의 문학적 업적은 대단하지만, 노벨문학상 수상은 한국 문학이 국제사회에서 주목받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문학 번역자들에게 도착지 언어권 독자들의 정서와 감수성을 고려하는 것은 빼놓을 수 없는 고민거리다.
데보라는 “처음 한국문학을 번역할 당시 영국 독자들이 한국 문화에 익숙하지 않고 중국이나 일본과 비슷하게 여기는 경향도 있었다”며 “음식이라든지 형·언니 같은 호칭 같은 한국 고유의 정서를 살려서 명확하게 전달하려 했다”고 밝혔다.
안톤 허는 “모든 훌륭한 문학 작품은 세계의 유산이고 세계의 독자들이 누릴 권리가 있다”며 “내 번역을 이해하는 독자가 있을 것이란 믿음, 내가 읽고 있는 텍스트를 독자들도 즐기고 있다는 믿음을 갖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번역가의 창의적 번역에 대한 생각에는 두 번역자의 접근법이 갈렸다.
데보라는 “주체적인 번역은 필연적으로 창의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번역에서 무엇이 창의적인지 아닌지 구분하는 건 의미가 없다”며 “원문과 멀어지는 번역문은 그만한 의도가 있다. 감정적 효과나 역사적 맥락 살릴 때는 창의적인 번역을 선택한다”고 밝혔다. 반면 안톤 허는 “스스로를 매우 보수적인 번역가라고 생각한다. 가능한 한 원어를 그대로 살려 번역하는 편인데, 영어와 다른 한국어의 특징 때문에 어려울 때가 있다”고 했다.

번역가의 가장 중요한 자질에 대해서는 두 사람 모두 “문학 사랑”이라고 입을 모았다.
데보라는 “모든 번역가의 공통점은 문학작품에 대한 애정이다. 나는 유년시절뿐 아니라 성인이 되어서도 대부분 시간을 독서에 보냈는데, 그 덕분에 번역할 수 있는 직관을 갖게 됐다. 깊이 독서하고 몰두하는 것도 번역의 중요한 자질이다”고 말했다.
안톤 허도 “언어에 자질은 있는데 문학 사랑이 없다면 일반적인 통번역가를 하거나 법률 통역 같은 일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며 “번역은 창작 행위에 앞서 독서 행위”라고 말했다.
끝으로 사회자가 앞으로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에서 확고히 자리 잡기 위해 필요한 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안톤 허는 국가 차원의 지속적인 번역 지원을 꼽았다. “한국문학의 외국어 번역과 출판은 하나하나가 기적 같은 일이에요. 케이팝이 뜬다고 한국문학이 뜨는 게 아닙니다. 블랙핑크 음악 듣고는 갑자기 황석영 작품 읽고 싶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한국문학번역원이나 한국출판문화진흥원이 한국문학 번역을 조금씩 하고 있는데, 전문 번역가를 지원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샘플 번역 지원이 가장 중요해요.”
데보라는 “한국문학이 앞으로도 다양한 글로벌 언어로 번역될 것이라는데 의심이 없다”면서도 번역 대상 작품의 영역 확대를 주문했다. “지난 10년의 흐름을 보면 (한국문학의 외국어) 번역이 주로 현대문학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어요. 앞으론 고전이나 시, 비문학 분야의 책들도 번역될 가능성이 큽니다. 번역가들이 (그런 작품들도) 기꺼이 번역할 수 있다는 의식을 갖는 게 중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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