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단풍 안 부러운 가을 억새, 너도 참 아름답구나
나무가 없어 밋밋하다는 민둥산
빈자리 채운 은빛 억새로 장관
영남알프스 간월재도 억새 명소
서울 하늘공원은 지금이 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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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익은 가을 과일을 한입 베어 물면 입안 가득 즙이 퍼지고 입꼬리가 올라간다. 이에 견줄 만한 게 가을 단풍이다. 새빨갛게 물든 잎을 시야에 담으면 미소가 번지고 탄성이 터진다. 이에 버금가는 게 또 있다. 가을 억새가 단풍을 질투하듯 화려하게 들과 산을 수놓는다.
억새 여행 전에 알아둘 상식이 있다. 많은 이들이 생김새가 비슷한 억새와 갈대를 혼동한다. 꽃이 피고 지는 시기도 9월에서 11월 초로 유사하다. 이 둘은 모두 볏과의 여러해살이풀이지만 서식지가 다르다. 갈대는 주로 습지나 갯가, 호수 주변에서 자라고, 억새는 산이나 들에 산다. 색도 다르다. 억새가 흰색이나 은빛, 황금빛을 띤다면, 갈대는 갈색이다. 키 차이도 난다. 다 자란 억새는 2m 정도인데, 갈대는 3m가 넘는다.
강원도 정선군에 있는 민둥산은 국내 대표 억새 여행지다. 해발 1119m로 등산 애호가들 사이에서 ‘100대 명산’으로 꼽힌다. 민둥산이란 이름은 ‘민둥민둥하다’에서 왔다. ‘산에 나무가 없어 밋밋하고 훤하다’는 뜻이다. 이름 그대로 민둥산엔 나무가 없다. 짙푸른 나무와 그늘이 없어 초라하고 볼품없을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 자리를 채운 억새가 울창한 나무 못지않게 아름답다. 민둥산 정상까지 난 여러 갈래 좁은 길을 오를 때마다 바람에 흔들거리는 억새의 장관을 목도한다. 마침, 오는 8일까지 ‘민둥산 은빛 억새 축제’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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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둥산 등반엔 몇가지 방법이 있다. 등산 난도를 기준 삼으면 상중하로 나뉜다. 상급은 증산초등학교에서 출발해 가파른 구간(2.6㎞)을 오르는 코스다. 숨이 턱밑까지 찰 정도로 경사가 급하다. 중급도 출발지는 증산초등학교다. 3.2㎞의 완만한 구간이다. 놀멍쉬멍 오를 수 있는 길이다. 민둥산 7부 능선에 있는 발구덕마을에서 출발하는 하급 코스는 수월하다. 이 마을까지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잘 닦여 있어 차로 이동한 뒤 오르면 된다. 30여분이면 정상에 도착한다. 다만 축제 기간엔 통제된다.
민둥산은 다른 억새 여행지와 견줘도 특별한 매력이 있다. 정상 인근에 있는 ‘돌리네’에 이르면 감탄사는 배가 된다. 카르스트 지형 특징 중 하나인 돌리네는 석회암 지대의 갈라진 틈에 이산화탄소와 빗물이 스며들어 생긴 웅덩이다. 작은 호수 같다. 최근 몇년간 민둥산 돌리네는 2030세대에 사진 명소로 부상했다. 언뜻 보면 마치 우주선이 내려앉았다가 떠난 자리처럼 보여서다. 특이한 풍경을 배경 삼아 찍은 사진엔 ‘좋아요’와 댓글이 수십개 달린다. ‘여행 명소 찾는 덴 귀신’이란 소리를 듣게 되니 사진을 올린 이는 그저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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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등반한 9월 민둥산의 추억이 잊히지 않는다. 경사가 급한 코스를 선택했는데 다리에 힘이 절로 들어갔다. 넘어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고개가 푹 숙여졌다. 안전을 확보하려는 몸의 자동 반응이었다. 하지만 이내 몸이 풀리고 말았다. 한발 한발 내디딜 때마다 몸에 닿는 억새가 긴장을 풀어줬다. 그저 천천히 오르면 된다고, 빨리 오르려 할 필요 없다고, 그러니 발과 몸에 힘을 줄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는 듯했다. 그날의 기억이 지금도 이어진다.
영남알프스 자락에 있는 간월재(900m)도 억새 명소다. 영남알프스는 울산 울주군, 경남 밀양시와 양산시, 경북 청도군과 경주시 등 5개 시·군에 걸쳐 있는 산군이다. 해발 1천m 이상의 가지산, 신불산, 천황산, 운문산, 재약산, 간월산, 영축산, 고헌산, 문복산 등이 해당된다. 이들 산의 능선이 한폭의 그림처럼 유려하게 이어져 마치 유럽의 알프스산맥 같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신불산과 간월산 능선이 만나는 자리가 간월재다. 33만㎡(약 10만평) 규모의 간월재엔 가을이면 억새가 바다를 이룬다. 그 사이로 걷기 편한 나무 데크길이 놓여 있다. 신이 천국으로 인도하는 길처럼 우아하게 뻗은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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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일 간월재는 음악 공연장으로 변신해 ‘2026 울주오디세이’가 열렸다. 2022년 이후 4년 만에 열린 음악제를 찾은 등산객들은 하늘하늘 흔들거리는 억새를 벗 삼아 팝페라 테너 임형주와 국악인 최재명, 인디 밴드 중식이의 연주를 들었다. 노랫가락에 맞춰 고개를 까딱거리는 등산객들의 알록달록한 옷이 억새와 어우러져 한폭의 그림을 만들었다.

간월재에서 차로 30여분 거리에는 등산객들의 보석 같은 맛집들이 있다. 울주군 언양읍 일대에 모여 있는 ‘언양불고기’ 명가들이다. 그중에서 ‘언양기와집불고기’는 100년 넘은 한옥을 개조해 영업하는 식당이다. 4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이젠 고유명사처럼 불리는 언양불고기는 얇게 저민 소고기를 간장 양념에 재운 뒤 석쇠에 굽는 언양읍 향토음식이다. 소도시 음식이 전국권 맛이 된 데는 1960년대 고속도로 건설 노동자들의 공이 컸다. 일제강점기 언양 지역 일대는 도축장 등이 성업해 ‘소고기 고장’이란 소리를 들었다. 가난했던 시절 지역민은 소고기를 최대한 얇게 썰어 양념에 재운 뒤 구워서 조금씩 잘라 반찬으로 먹었다고 한다. 이런 방식으로 살아남은 언양불고기를 맛본 건설 노동자들은 공사가 끝난 뒤에도 그 맛을 잊지 못해 소문을 냈다. 억새만큼이나 여행객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는 맛이다.


서울에도 억새 명소가 있다. 마포구 상암동 월드컵공원 안에 있는 하늘공원 억새는 지금이 가장 아름답다. 이곳 억새의 매력은 도심 풍광을 오롯이 자기 것으로 한다는 점이다. 일렁이는 억새 사이를 걷다가 눈을 들면 멀리서 반짝이는 마천루가 보인다. 19만1736㎡(약 5만8천평) 규모의 공원을 온통 수놓은 억새는 장관이다. 지난달 23일 ‘서울억새축제’는 끝났지만, 축제의 흥겨움이 빠져나간 자리엔 햇볕과 조우한 은빛 억새가 일렁인다. 이 밖에 합천 황매산, 포천 명성산, 창녕 화왕산, 보령 오서산, 장흥 천관산 등도 억새 군락지로 이름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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