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장, 정치의 장 [세상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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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원식 | 동덕여대 ARETE 교양대학 교수
영화 ‘암살자(들)’을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1974년 육영수 여사 피살 사건이라는 민감한 역사적 비극을 다룬 이 작품을 두고 한쪽에서는 예술적 상상력이자 표현의 자유라며 상영과 관객의 선택을 옹호하는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정치적 의도나 편향성을 의심하며 제약과 경계를 가해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영화나 예술 작품을 오직 정치적 잣대로만 평가하고 출연 배우의 집 앞까지 가서 욕설 섞인 거친 항의를 하는 모습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참기 힘든 고역이다. 그러나 그들의 행태가 습관적 망동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비난의 결 속에서 우리가 직면해야 할 흥미로운 질문이 하나 있다. 바로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나 다른 해석을 시도하면 ‘역사 왜곡’이자 ‘금기’라며 법적·사회적 처벌을 주장하던 이들이, 왜 자신들이 지지하거나 관심 두는 영화에 대해서만 ‘표현의 자유’라는 전지전능한 방패를 들어 올리는가?’라는 반론이다.
사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깊은 모순과 직면하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 사회의 여러 진영들은 저마다 손대서는 안 될 ‘성역’을 하나씩 품고 있다. 내가 아끼는 가치는 침해할 수 없는 ‘표현의 자유’가 되고, 상대가 주장하는 것은 사회질서를 위협하는 금기로 치부하는 모습이 없다고 아무도 자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어쩔 수 없는 자기모순 앞에서, 우리는 두개의 선택지를 맞이하게 된다. 하나는 모두의 성역과 금기를 회피하고 나머지에서 그나마 동의가 가능한 공약수를 찾아서 인정하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서로의 성역이라 하더라도 허용의 범위를 넓혀가는 공배수를 찾아가는 것. 현대 민주주의에서 우리 못지않게 다른 많은 나라가 바로 공론장의 공약수와 공배수를 찾는 중간에서 길을 잃고 어지러이 흔들리고 있다. 즉, 민주주의의 위기 속에는 ‘표현의 자유’라는 대원칙이 과연 현실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적용되어야 하는지 묻는 꽤 무거운 담론이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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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표현의 자유’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위해서는 먼저 ‘암살자(들)’을 빌미 삼아 영화적 표현을 고교 야구의 ‘스타벅스’ 사태나 이진숙 의원의 ‘5·18 국회 토론회’와 모두 싸잡아 등치시키는 단순 논리를 파훼할 필요가 있다. ‘공배수의 사회’가 모든 영역에서 무분별한 정치 구호나 선동을 허용하자는 아노미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핵심적인 기준이 될 만한 것이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장(Field) 이론’이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우리 사회는 예술·학술·정치·스포츠 등 저마다 고유한 규칙과 논리가 지배하는 ‘장’의 집합체이다. 각 장이 외부의 정략적 침범으로부터 독립하여 고유의 규범(nomos)과 자율성을 지킬 때 비로소 건강한 사회가 성립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자유로운 표현이 최우선 원칙으로 작동해야 할 ‘공론의 장’과, 직접적인 행위를 통제하기 위해 개별적 제도 규범을 갖는 ‘행위의 장’에 대한 구분이 필요한 것이다. 고교야구 경기장에서 불거졌던 ‘스타벅스’ 관련 논란이 대표적인 예다. 스포츠라는 장은 공정한 경쟁과 경기 규칙이라는 자율성이 생명이다. 승부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거나 정치적·사회적 메시지를 관철하기 위해 경기장에 경기 외적 사안을 끌고 들어온 것은 표현의 자유 원칙이 아니라 공정한 승부의 원칙을 오염시키는 행위였다. 이진숙 의원이 ‘학술 재조명’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국회라는 정치 공간에서 5·18 토론회를 열어 정쟁의 장으로 악용했던 사례 역시, 학술의 탈을 쓰고 있었지만 직접 법과 제도를 결정하는 정치 행위의 장에서 전형적으로 ‘장의 교란’을 유도하는 정략적 도구였다.
결국 우리의 ‘공배수’의 원리가 최대로 작용해야 할 무대와 스포츠 경기의 규칙이나 법·행정 영역에서 작용하는 권력의 규범은 동일할 수 없는 것이다. ‘표현’을 통한 상호작용이 이뤄지는 예술, 문화, 학술의 장을 끌어다가 이를 얼렁뚱땅 정치와 등치시켜서 상영 금지를 주장하거나 배우의 출연 중단 요구와 같은 시대착오적 통제를 주장하는 우스꽝스러운 일은 그만두자는 이야기이다. 펜을 들고 있는데 이를 잡겠다고 칼 들고 설치는 것만큼 모양 빠지는 일도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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