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뚫고 시대를 넘은 ‘역사적 인간’ 정수일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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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7월3일, 남으로 온 지 12년이 지난 어느 늦은 아침이었다. 낮에는 학자로 연구하고, 밤에는 첩보 활동을 하는 이중생활도 인이 박였다. 깐수 교수의 머릿속은 온통 논문 생각으로 가득했다. 실크로드가 신라 경주까지 연결됐다는 ‘실크로드 한반도 확장설’을 학계에서 공인받을 기회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서울 중구 플라자호텔 비즈니스센터로 서둘러 갔다. 북으로 보내는 활동 보고용으로 팩스를 보내던 그의 두 팔이 순식간에 붙들렸다. 하필 독극물 앰플을 빠뜨리고 외출한 날이었다. 공작원 교육을 받는 동안 철저히 앰플 사용법을 익혔고, 살아서 체포된다면 북의 가족이 어떻게 될 거라는 암시도 받은 터였다. 눈앞이 아득해졌다.
남편이 레바논계 필리핀인이라고 믿었던 배우자는 더 큰 충격에 빠졌다. 무하마드 깐수라는 이름도 가명이었고, 나이도 알던 것보다 12살이 많았다. 가족과 제자, 동료 모두 충격에 휩싸였다. 죄명은 국가보안법이 처벌하는 간첩죄, 잠입·탈출죄, 회합·통신 등의 죄, 금품수수죄. 공소장에 적힌 공소사실만 208장이었다. 검사는 사형을 구형했다. 두개의 조국 사이를 진자처럼 오가던 그는 최후 진술에서 간곡하게 부탁했다. “압수된 컴퓨터에 저장된 ‘고대 동서교류사’에 관한 졸고만은 꼭 살려주십시오.”


‘일곱개의 이름'은 실크로드와 문명교류사 연구에 헌신한 학자, 대학 교수, 남파 공작원, 중국 외교관, 번역가, 작가 등 여러 사람의 인생을 살다간 정수일(1934~2025)의 일대기를 담은 평전이다. 저자 차병직 변호사는 20년 동안 정수일을 만나면서 그와 나눈 이야기들을 철저히 기록했고, 재판 기록과 저서를 총체적으로 검토해 마침내 한권의 책으로 일생을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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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일의 삶은 20세기 세계사 한가운데를 정확히 꿰뚫었다. 그는 만주국 탄생과 일본 패망, 중국혁명과 문화혁명, 한국전쟁과 냉전, 알제리 독립전쟁을 모두 겪으면서 역사의 파도 위에 올라탔다. 책은 정수일을 경계인이라기보다 능동적으로 삶을 선택하고 경계를 뚫고 나아간 인물로 재현한다.
1934년 중국 연변(옌볜)의 화전민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정수일은 우수한 성적으로 베이징대학에 입학했다. ‘정서우이’라 불리며 아랍어를 전공하고, 신중국 국비 장학생으로 선발된 뒤 이집트 유학을 했으며, 모로코에서는 중국 외교관으로 일했다. 무용가 최승희의 제자인 박광숙을 만나 한눈에 반한 그는 결혼 후 완전한 새 삶을 시작하고자 중국 당국에 ‘조국’인 북한으로 보내줄 것을 간청했다. 1963년, 그는 “환국”(정수일의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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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엔 문화혁명의 광풍이 휘몰아쳤고, 북한에선 김일성 유일체제가 진행되며 숙청 바람이 불었다. 1974년, 대남 공작원 임무를 부여받은 그는 배우자와 어린 세 딸과도 헤어져 4년간 거듭된 세뇌 교육을 받았다. 신분 위장을 위해 레바논, 튀니지, 말레이시아, 파푸아뉴기니, 호주, 필리핀 등으로 이주했다. 무하마드 깐수라는 이름과 레바논계 필리핀인 신분을 얻어 남한에 입국했으며, 단국대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는 사학과 교수로 임용됐다. 뜨거운 시를 적어 띄우며 연인의 마음을 얻고 나서 결혼도 할 수 있었다.
정수일은 양쪽 조국과 양쪽 가족 모두를 사랑했다. 일곱개의 이름, 다섯개의 국적을 얻어야만 했던 ‘역사적 인간’을 움직인 원동력은 정작 그가 쓴 시구처럼 귀여운 “한송이 들꽃”을 “더 사랑하고 싶어”했던 마음일지도 모른다. 체포된 뒤 남쪽의 가족에게 자신을 잊어달라 절규했지만 그의 배우자 윤승희는 도리어 힘이 되어주리라 결심했다. 그런 배우자를 위해 정수일은 전향 의사를 밝혔고, 100통 가까이 편지를 썼다. 윤승희는 답장하지 않았지만 교도소에 끝없이 책을 넣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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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했던 성격이었거니와 정수일은 스스로 ‘사상’에 대해 말을 아꼈다. 서준식은 그가 진정한 사회주의자일 것이라고 여겼으며 보수 언론은 회색주의자나 기회주의자로 평가했다. 가까운 작가였던 이호철 또한 그를 호의적으로만 여기지 않았다. 그의 정체가 대관절 어떻게 드러나게 됐는지는 여러 추측이 떠돈다. 의도적으로 경계를 느슨하게 하며 활동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북한 당국이 그를 버렸는지, 방치했는지,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중요한 건, 그가 체포되어 자유를 얻었고 그 뒤 학술 활동에 더욱 몰입했다는 사실이었다.

2005년 어렵사리 여권이 발급된 뒤 한겨레와 진행한 실크로드 답사 기행을 모아 쓴 책을 포함해 그는 21권의 책을 썼다. 정수일은 그저 끝까지 ‘문명 교류’라는 화두에 몰입해 ‘현장’을 찾아 꼼꼼하게 역사를 밝히는 학자이고자 했고, 그렇게 기억되길 바랐다. 그리고 윤승희가 있었다. 그는 기꺼이 재야 학자가 되어 가장 훌륭한 학술적 조력자로 남편 곁에 머무르며 함께했다. 90년이 넘는 시간의 문을 닫으며 끝까지 붙들고 있던 ‘문명교류학’ 교정지를, ‘인간 정수일’이 마침내 내려놓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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