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를 얻을 수 있는 방법…오직 자기 힘으로 깨달아야

광고

칠팔 년 전, 이웃에 산다는 한 젊은 어머니가 자기 아들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서 내 글을 읽었다고 했다. 내 글이 중학교 교과서에 실린 줄을 전혀 몰랐다고 했더니, 그 어머니가 그 책 한 권을 구해와 내게 전해주었다. ‘천재교육’이라는 출판사에서 낸 중학교 1학년 교과서였다. 내 책 ‘공부도둑’(후에 ‘공부이야기’로 개칭)에서 나온 ‘동굴에서 책 읽던 소년’이란 글을 아주 예쁜 삽화들과 함께 ‘책과 여우 이야기’로 제목을 바꿔 싣고 있었다.
내가 쓴 글이 종종 다른 교재에 실리기도 했지만, 어린 학생들이 읽는 중학교 교과서에 나온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내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다른 이들에게도 그만큼 공감을 주는 소재가 되었다는 점이 무척 흐뭇하다. 특히 그 글에 담긴 이야기는 평소 내 삶 속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었고, 지금도 그 영향 아래에 있다.
이야기 자체는 무척 단순하다. 책이 무엇인지조차 어렴풋이만 알고 있던 어린 시절, 외삼촌을 졸라 ‘옛날이야기’ 한 편을 들은 일이 있다. 옛날 옛적에 나 만한 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어느 날 가까운 친구였던 여우 한 마리와 함께, 커다란 산속으로 깊이깊이 들어갔다. 얼마나 들어갔는지 가늠이 안 될 무렵, 저쪽 골짜기에서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도인이 책을 한 권 들고 나타났다. 도인은 아이에게 그 책을 주면서 건너편에 보이는 동굴 안에 들어가 전부 읽고 나오라고 했다. 거기서 그 책을 마지막까지 다 읽고 나오면 ‘도’를 얻을 것이요, 만일 한 장이라도 덜 읽고 나오면 읽은 것조차 모두 무효로 돌아갈 거라고 했다. (나는 ‘도’라는 것이 뭘 말하는지 잘 몰랐지만, 외삼촌의 표정으로 보아 이것만 얻으면 뭐든지 다 알 수 있고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아주 신기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아이는 기꺼이 책을 받아 들고 굴속으로 들어가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밖에서 여우가 어서 빨리 나와 같이 놀자고 거듭 재촉했다. 꾹 참고 읽어나가던 이 아이는 마지막 한 장이 남았을 때,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굴을 뛰쳐나왔다는 이야기다.
광고
이 이야기는 긴 여운을 남겼다. 언제부터인가 내가 이 이야기 속 소년이 되어 도인에게서 그 신비스러운 책을 전해 받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이런 착각은 아예 현실이 되어 내가 이미 이 책을 전해 받았고, 지금도 열심히 읽어나가고 있다는 생각마저 하게 됐다. 단지 그 책이 하나의 실물로 내 손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읽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결국은 그 책을 읽는 일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다. 말하자면 내 생애 자체가 바로 이 동화의 한 구현물이 되어버린 셈이다.
이에 더해 책을 지금 손에 쥐고 있는데도 아직 마지막까지 읽어내지 못하고 허송세월만 하고 있지 않은가 하고 자책도 한다. 이런 자책에는 이유가 없는 것도 아니다. 책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나는 대체로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는 인내력이 별로 없다.(물론 문학 작품은 예외지만) 적어도 도사가 전해준 수준의 책이라면 결코 가볍게 읽힐 리가 없겠는데, 나는 그러한 책일수록 잘 읽어내지 못하니 허물은 결국 내 쪽에 있다.
광고
광고
물론 이것은 어처구니없는 착각이다. 세상에 정말 이런 놀라운 책이 있을 리도 없고, 설혹 있다고 해도 이를 누구나 읽어서 효험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구도를 머릿속에 지니는 것만으로 적지 않은 지적 자극을 받는다. 우선 그 책이 어디엔가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에 나는 끊임없이 책들을 찾아 나서고, 일단 손에 들어오면 뛰는 가슴을 안고 첫 장을 넘긴다. 그러나 대개는 몇 쪽 못 읽어 기대에서 벗어남을 느낀다거나 또는 무슨 말을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아 덮어버리게 된다. 안타깝게도 기대가 컸던 책일수록 그런 일이 흔하다. 내 나름으로는 이야기 속 소년을 교훈 삼아 더 참고 읽어나가려 하지만, 고백하건대 끝까지 읽어낸 책은 그리 많지 않다.
우리 주변에는 이른바 고전이나 명작, 또는 고명한 아무개가 추천한 책이다 하는 것들이 수없이 많다. 어렵사리 구해서 읽어보려 시도해 봤지만, 대개는 ‘너무 어려워’ 큰 진척을 이루지 못했다. 사실 ‘어렵다’는 말은 그리 적절하지 않다. 그저 내 이해 수준과 현재 관심사에 잘 맞지 않는다는 표현이 더 맞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들을 쌓아놓게 된다. 언젠가 내 이해 수준이 올라가거나 관심사가 바뀌면 읽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또 한편으로는 새 책들을 끊임없이 물색해 나간다. 도인이 읽으라는 책을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 싶어서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다 보니, 내 서가에는 읽어야 할 책들이 겹겹이 쌓여간다.
광고
정년 퇴임 이후 무제한으로 주어질 시간에 기대를 걸기도 했다. 그때가 되면 시간이 남아돌 것이니 천천히 곱씹으며 읽어나가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막상 퇴임을 하고 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많지도 않다. 오히려 읽는 속도가 느려지면서 하루 24시간이 마치 12시간으로 줄어드는 기분이다.
나이 여든의 끝자락이 다가오고 있지만 지금도 도인이 읽으라고 전해준 책 이야기를 뇌리에서 지울 수 없다. 무엇보다 내가 도인에게서 받은 경고, 마지막 장까지 읽지 않으면 모두 무효가 될 것이라는 이 한마디가 끝내 마음에 걸린다. 읽어도 읽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끝까지 안 읽으면 모두 무효가 된다는 이 경고는 결코 가벼울 수가 없다.
그래서 이리저리 생각들을 펼쳐보았다. 도대체 책 읽기에 ‘마지막 한 장’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그러한 것이 과연 있기나 한가. 있다면 그것은 또 어떻게 알 수 있나. 그러다가 문득 놀라운 결론에 이르렀다. 도인이 전해준 책의 마지막 한 장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글자로 채워진 것이 아니라 백지로 남아있는 낱장이라는 생각이다. 어쩌면 그 책은 명료한 해답을 지닌 완성본이 아니라 독자가 자기 힘으로 완성해 나가야 할 미완성 과제였는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아이가 이걸 다 읽지 못하고 뛰쳐나온 이유를 알겠다. 글자가 없는데 어떻게 읽을 수 있었겠나. 동화 속 이야기는 거기서 그쳤지만, 독자의 상상력은 그 다음으로 이어진다. 아이가 책을 들고나와 마지막 한 장을 채워 넣어 ‘도’를 얻었을 수도 있고, 끝내 실패해 ‘도’를 놓쳤을 수도 있다.
광고
아, 그렇다. ‘도’라는 것은 책을 읽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책이 답을 준다면 그것은 이미 내 ‘도’가 아니다. 오직 자기 힘으로 깨달아야만 내 ‘도’가 될 수 있다. 어쩌면 거듭거듭 깨달아야 할지도 모른다. 어떻게 한꺼번에 다 깨달을 수 있겠는가. 적어도 내 경험에 의하면 그렇다. 내가 대단한 깨달음에 이르렀다고 생각할 때도 있다. 그러나 지나 놓고 보면 그것은 한 단계를 겨우 넘어선 것이고, 또 넘어야 할 깨달음의 산이 저 앞에서 다시 기다리고 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내 삶에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마지막 한 장의 백지를 채워야겠다는 것, 이것을 위해 살아야겠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채우는 작업을 시작하고 있다. 불완전한 것임을 알면서도 조금이나마 새로운 깨달음에 이를 때마다 일단 이것을 기록으로 정리해 보자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자 그동안 읽어 온 책들이 새로운 모습으로 떠올랐다. 이 책들은 마지막 한 장을 채우는 일을 돕기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이다. 지금까지 나는 이 책들이 내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하는 관점에서 보아왔다면, 앞으로는 내가 쓰고 있는 새 결론에 비추어, 이 책들이 정말 여기에 부합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를 보고 싶은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내가 이들 책의 정당성을 추인하는 결과가 될 것이며,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내가 틀렸는지, 그 책들이 틀렸는지를 놓고 대결해 볼 일이 생긴다. 이 대결이야말로 책 읽기의 진정한 묘미가 아니겠는가.
장회익
1938년 경북 예천 출생. 서울대 물리학과에서 30여년 교수로 일하다 퇴임하고, 지금은 충남 아산에서 살고 있다. 자유로운 사색을 통해 통합적 학문의 모습을 그려보는 ‘소요거사’로 지낸다. 물리학 말고도 과학이론의 구조와 성격, 생명의 이해, 동서 학문의 비교 연구, 온전한 앎의 성격 등에 관심이 있다. 저서로는 ‘과학과 메타과학’, ‘삶과 온생명’, ‘생명을 어떻게 이해할까?’, ‘공부도둑’(‘공부 이야기’),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할까?’ 등이 있다.
KioskNews shows a cleaned-up reading view extracted from the publisher’s page — the original always lives on their site, not ou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