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억 내수’ 공식 깨진 中 가전… 로봇·B2B로 생존 지도 바꿨다

14억 인구를 등에 업고 성장해 온 중국 가전업계의 ‘성장 공식’이 흔들리고 있다. 냉장고·에어컨 등 전통 가전 시장이 성숙기에 접어든 데다 부동산 장기 침체까지 겹치면서 중국 내수에 의존해 온 기업들은 줄줄이 역성장했다. 반면 로봇 청소기처럼 새로운 가전 수요를 만들거나 해외·기업 간 거래(B2B) 시장으로 일찌감치 성장판을 옮긴 기업들은 두 자릿수 성장을 이어갔다. 과거 중국 가전 기업의 최대 무기였던 거대한 내수시장이 약해지면서 ‘중국 밖에서 새로운 고객과 수요를 만들었느냐’가 기업 성적을 가르고 있는 것이다.
13일 중국 시장조사 업체 아오웨이윈왕(AVC)에 따르면 올 상반기 중국 가전제품 소매 판매액은 4250억위안(약 87조원)으로 전년보다 9.9% 감소했다. 특히 에어컨 판매액은 15.9% 줄었다. 냉장고·세탁기·에어컨이 집집마다 보급되면서 시장이 신규 구매보다 교체 수요 중심으로 바뀐 데다 주택 경기 침체로 이사·혼수 수요까지 위축된 영향이다. 과거 중국 가전 판매를 끌어올렸던 중국 정부의 ‘이구환신(낡은 제품을 새것으로 교체함)’ 보조금도 수요를 앞당겨 소진하면서 올해 들어 효과가 약해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내수·전통 가전에 발목 잡힌 하이얼·그리
중국 대표 가전 기업들의 실적에는 내수 침체가 고스란히 반영됐다. 하이얼스마트홈(하이얼)은 올 상반기 매출이 1521억위안으로 2.8% 감소했고 순이익은 103억위안으로 14.3% 급감했다. 중국 매출이 약 5% 줄었다. GE어플라이언스 인수 등을 통해 해외 매출 비율을 절반 이상으로 높였지만 최대 해외 시장인 미국의 주택 경기 둔화와 관세 부담까지 겹치면서 내수 부진을 만회하지 못했다. 하이얼에서 냉장고 및 주방 가전 사업을 총괄하는 우용 부사장과 남아시아 지역 최고경영자(CEO) 황더청이 최근 실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한 것으로 알려졌다.
에어컨 강자인 그리의 상반기 매출도 8.2%, 순이익은 7.9% 감소했다. 전체 매출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소비 가전 의존도가 발목을 잡았다. 하이센스가전 역시 매출이 5.2%, 순이익은 20.2% 줄었다. 한때 중국의 부동산 호황과 가전 보급 확대를 타고 성장했던 기업들이 시장 성숙과 함께 동시에 성장 한계에 부딪힌 것이다.
◇로봇·B2B·프리미엄… 각자 찾은 ‘탈출구’
전통 가전에서 출발했지만 사업 영역을 넓힌 기업들은 선방했다. 메이디의 상반기 매출은 2610억5000만위안으로 3.5%, 순이익은 1.7% 증가했다. 성장률 자체는 높지 않지만 경쟁사들이 역성장한 것과 대비된다. 에어컨에서 쌓은 냉각·압축기 기술을 빌딩 냉난방과 데이터센터 열 관리로 확장하고, 독일 산업용 로봇 기업 쿠카를 인수해 공장 자동화 시장까지 진출한 결과다. 상반기 빌딩테크와 로봇·자동화 사업 매출은 각각 10% 이상 증가했다. 중국 소비자가 가전을 덜 사자 기업의 데이터센터와 공장을 새로운 고객으로 만든 것이다.
TCL은 ‘저가 중국 TV’에서 벗어나는 전략을 택했다. 상반기 매출은 16.4%, 조정 순이익은 54.3% 증가했다. 고가 제품인 미니 LED TV 출하량은 77.1% 급증했고 해외 시장 출하량은 두 배 이상으로 늘었다. 프리미엄 제품과 해외 시장을 동시에 공략한 것이 주효했다.
기존에 없던 수요를 만든 기업은 불황에도 성장했다. 로봇 청소기 업체 로보락의 상반기 매출은 100억8000만위안으로 27.6% 증가했고 순이익은 45.6% 급증했다. 에코백스도 매출이 19.2% 늘었다. 이미 집집마다 있는 냉장고를 새것으로 바꾸기를 기다리는 대신 사람이 하던 청소를 로봇에 맡기는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 세계로 확장한 것이다.
중국 가전 업계의 이런 재편은 삼성전자·LG전자 등 한국 기업에도 위협이다. 과거 중국 업체와의 경쟁이 저가 제품을 앞세운 가격 경쟁이었다면 이제 새로운 제품군을 선점하거나 프리미엄 시장 점유율을 늘리고 있기 때문이다.
테크 업계 관계자는 “중국의 최근 내수 불황이 역설적으로 중국 가전 업체들의 옥석을 가리면서 살아남은 기업들의 글로벌 경쟁력을 더 강하게 만들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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