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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October 9, 2026

어리석은 열정이 빚은 존엄의 역사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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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 없는 영웅들 l 퍼디아 레넌 지음, 최리외 옮김, 다산북스(2026)
영광 없는 영웅들 l 퍼디아 레넌 지음, 최리외 옮김, 다산북스(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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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서양 고전을 강의하는 친구의 안내로, 학생들이 그리스 원어로 공연하는 ‘오이디푸스왕’을 보러 갔다. 한국어와 그리스어 알파벳 자막을 보면서 후대로 전해진 고대 그리스어의 운율을 느끼는 방식이다. 관객 중 극소수만 알아들을 언어로 연기한다는 의미는 무엇일지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뒤로 갈수록 감탄만 나왔다. 공지 사항까지 그리스어로 바꾸고, 숨 쉴 틈도 없는 긴 대사를 암기한 학생들의 열정이 작은 학교 극장 안을 가득 채웠다. 소포클레스도 뿌듯해할 만한 열연이었다.

‘영광 없는 영웅들’ 또한 연극을 향한 아마추어의 열정에 관한 작품이다. 때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인 기원전 412년, 아테네 원정군이 시라쿠사에서 대패하여 병사들이 시라쿠사에 포로로 잡힌 시점이다. 연극에 빠진 시라쿠사인 겔론과 람포는 채석장의 아테네 포로들을 모아 에우리피데스의 극을 올리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공격자 아테네인들을 향한 시민들의 반감은 여전히 높지만, 가진 것도 없고 위대할 것도 없는 두 젊은이는 스스로 연출자가 되어 꾸준히 배우를 모으고 제작자를 구한다. 마침내 열심히 준비한 연극의 막이 오르던 날, 예상치 못한 사건이 벌어진다.

공습 한가운데에서 극을 올리는 ‘더 드레서’나 종말 후 세계를 유랑하는 극단이 등장하는 ‘스테이션 일레븐’ 등 재난 속에서도 쇼를 이어가려 애쓰는 이들을 다룬 서사들이 있다. 여기에는 질문이 반드시 따라온다. 살아남기도 힘든데, 연극을 한다고, 왜? 하지만 삶이 힘들기에, 인간은 이를 버틸 수 있는 아름다움을 원한다. 우리는 흙바닥에서 기는 존재가 아니고, 별을 바라보며 꿈을 꾸기에 이야기를 나누고, 다른 생을 연기하며, 노래한다. ‘영광 없는 영웅들’에서는 “품위”라고 표현되는 가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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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우리피데스의 굳건한 팬인 겔론이 고른 작품이 ‘메데이아’와 ‘트로이아의 여인들’이라는 것에서도 이런 의도를 읽을 수 있다. ‘메데이아’는 배신과 모욕을 당한 여성이 피의 복수로 자기 위치를 찾으려는 이야기이고, ‘트로이아의 여인들’은 트로이 전쟁 패배 후의 여성들의 운명을 다뤘다. 역사는 승자만 기억한다고 한다. 하지만 가장 비천한 위치에 있던 패배자들이 살아남아 존엄을 구한다면 그 삶이 곧 역사가 되는 법이다.

무언가에 열정을 가진 사람, 팬의 어원이 된 ‘fanatic’에는 광인이라는 뜻도 있지만, 이도 신에게서 영감 받는다는 라틴어 파나티쿠스에서 유래했다. 이 책의 제사에는 에우리피데스의 ‘박코스의 여신도들’ 대사가 있다. “우리 인간을 넘어선 것, 인간보다 더 위대한, 닿을 수 없을 만큼 위대한 것은 광인들, 광인에게 귀 기울이는 이들, 더 나아가 그들을 믿는 이들에게 있다.” 그러니 굳이 ‘왜?’라는 질문은 거둬둔다. 열정은 합리적 이해의 대상이 아니다. 그 자체로 솟아나고, 퍼져가며, 타인의 마음을 움직일 뿐이다. 이런 팬들은 거창한 의도 없이도 역사를 만들어간다. 시라쿠사의 채석장에서, 학교 극장의 무대에서, 종말 후의 폐허에서 그들은 늘 인간에게서 위대한 것을 찾아내고 지켜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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