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가장 멋진 선물, ‘없음’의 풍요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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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민의 그림책이 철학을 만날 때
강의 준비를 하느라 추석 선물 변천사를 확인했다. 1950년대 달걀부터 현재의 다변화한 선물 세트까지, 경제 상황과 트렌드를 거울처럼 반영하는 선물 목록을 훑어보니 흥미로웠다. 선물이란 단어는 인간관계에 지치고 돈 계산에 바랜 중년의 마음도 기분 좋게 간지럽힌다. ‘추석이란 무엇인가’는 익히 고민했으니 다른 걸 고민해 보자. 좋은 선물이란 무엇일까?
‘이보다 멋진 선물은 없어’는 이 질문에 멋진 답을 주는 책이다. 특별한 날, 고양이 무치는 가장 친한 친구인 강아지 얼에게 선물을 하고 싶었다. 밥그릇도 방석도 장난감도 있는, 모든 걸 다 가진 친구에게 뭘 주면 좋을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결론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무치는 아무것도 없는 것을 선물하기로 한다. 세상엔 너무 많은 것이 가득 차 있는데, 아무것도 없는 걸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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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할아버지는 티브이(TV)에서 볼 게 아무것도 없다고 하고, 두지는 할 게 아무것도 없다고 하고, 밀리 할머니는 장 보러 가서 살 게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하지만 그 모든 곳엔 너무 많은 것들이 있었다. 무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다가, 끝내 아무것도 없는 것을 떠올린다. 상자를 꺼내 아무것도 없는 것을 담는다. “이제 됐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 가득하네.”
얼은 빈 상자를 열어 보지만,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라 “너와 내가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둘은 꼭 껴안은 뒤 서로의 곁에 가만히 앉는다. 아무것도 없어도 좋았다. 둘이서 모든 것을 함께 할 수 있으니까. 선물 상자엔 아무것도 없지만 둘이서 온 우주를 가질 수 있는 사이라니, 이 법정 스님 같은 고양이와 강아지 앞에 스팸 선물 세트가 머쓱할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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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지카우치 유타는 우리가 ‘없음’은 잘 알아채지만 ‘있음’은 잘 깨닫지 못한다고 한다. 너무 쉽게 “없다”고 말하는 것을 슬퍼하는 김소연 시인의 시는 상당 부분 ‘있음’의 언어로 고쳐 말하려는 작업이다. 일상을 둘러보면 내가 받은 선물이 가득하다. 자연으로부터, 과거로부터, 동료 시민들로부터, 심지어 나로부터. 그런데 우리는 선물이란 단어를 참 납작하게 쓰고, 왜곡시키기도 잘한다. 나는 선물을 뜻하는 영어 단어 ‘기프트(gift)’가 독일에서는 독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좋아한다. 선물은 종종 독이 되기 때문이다.
엄마가 되는 일에 관한 책을 몇권 썼기에, 아이를 어떤 사람으로 키우고 싶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다. 내가 키우고 싶은 방향대로 아이가 큰다는 건 마치 기도를 하면 세계 평화가 이루어진다는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상상과 희망은 인간이 받은 선물이니까, 그 선물을 풀어 봐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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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은 주로 “범죄자가 되지 않게 키우고 싶어요”라고 답했다. 진심으로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서 좀 더 욕심을 낸다면, 좋은 선물을 할 줄 아는 사람이면 좋겠다. 언뜻 소박해 보이는 이 대답은 나만 생각하지 않는 마음, 경제적 여유, 취향과 센스, 관찰력과 다정함 등등을 켜켜이 깔고 있는, 실로 엄마의 야망과 욕망이 넘치는 대답이다.
한 발 더 나간다면 이 이야기처럼 존재 자체가 좋은 선물이 되는 사람이면 좋겠고, 없음의 풍요와 평화를 누릴 줄 아는 사람이면 좋겠다. 아, 역시 부모의 욕심은 하해와 같이 넓고도 깊다. 독이 될지 모르니 버리는 게 좋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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