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래스카는 지금 ‘트럼프 찬반 투표’ 중
목소리 내러…길게 늘어선 줄 유권자들이 지난 20일 오전 9시쯤(현지시간) 알래스카주 앵커리지의 한 사전투표소 앞에서 줄을 서 있다. 앵커리지 | 정유진 특파원
앵커리지선 “경제 망쳐, 지긋지긋”…외곽선 “민주당 안 돼”
“당연히 트럼프를 찍었다.” “트럼프를 막기 위해 투표했다.”
20~21일(현지시간) 미국 알래스카주 앵커리지와 와실라 사전투표소에서 만난 주민들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린 이는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서 접전을 벌이고 있는 댄 설리번 공화당 후보도, 메리 펠톨라 민주당 후보도 아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었다. 선거가 투표용지에 이름도 없는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찬반 투표 성격을 띠고 있음을 보여준다. | 관련기사 6면
알래스카는 오랫동안 공화당 텃밭으로 분류됐다. 민주당 후보가 마지막으로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된 때는 2008년이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1964년 린든 존슨이 공화당 후보 배리 골드워터에게 승리한 이후 알래스카에서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하지만 이란 전쟁 이후 고물가의 직격탄을 맞으면서 알래스카의 견고했던 공화당 우위에 균열이 나타나고 있다. 펠톨라 후보가 현역인 설리번 의원과 박빙의 승부를 벌이고 있어서다.
20일 이른 아침 찾은 앵커리지 시내 사전투표소에는 치열한 선거 열기를 보여주듯 투표 순서를 기다리는 유권자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알래스카주 선거관리 당국에 따르면 지난 19일 사전투표 첫날 주 전역에서 약 1만2000명의 유권자가 투표소로 몰렸다. 페어뱅크스에서는 1시간30분을 기다려 투표한 유권자도 있었다고 한다.
알래스카는 지금 ‘트럼프 찬반 투표’ 중
미 중간선거 격전지를 가다
“두 배로 뛴 생활비…막막
전쟁도 트럼프도 끝내야”
“바이든 땐 물가 더 비쌌다”
지역마다 다른 표심 팽팽
공화·민주 상원 후보 박빙
투표소에서 만난 재키와 팀 부부는 “여행 계획이 있었지만 절대 투표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러 일주일 늦췄다”며 “이제 빨리 집에 가 짐을 싸야 한다”고 말했다. 이들은 이번 선거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로 ‘경제’를 꼽았다. 재키는 “우리는 은퇴자이기 때문에 고정 수입으로 살고 있는데 물가가 너무 올라 부담이 크다”고 말했다. 팀은 “우선 전쟁부터 끝낸 후 트럼프를 탄핵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항공기 정비사인 스티브도 “트럼프와 공화당이 미국과 알래스카 경제를 망치고 있다”며 울분을 토했다. 그는 “식료품 가격도, 유가도 너무 올라서 생활비가 두 배가 됐다”며 “올해 휴가도 안 가고, 새 물건 대신 중고품을 사고, 좋은 차는 팔아버렸다. 지긋지긋하다. 정말 그가 물러나길 원한다”고 말했다.
생필품 대부분을 항공편이나 선박으로 들여와야 하는 알래스카는 이번 고물가의 직격탄을 가장 크게 맞은 곳 중 하나다. 앵커리지·페어뱅크스·주노 등 주요 도시의 식료품 가격은 전국 평균보다 25~29%가량 높다. 교통 접근성이 떨어지는 외딴 지역의 물가는 더 심각하다. 베델에서는 우유 1갤런(약 3.8ℓ)이 16달러에 달하고, 북서부의 작은 마을 슝낙에서는 휘발유 가격이 갤런당 27달러에 육박한다.
하지만 앵커리지에서 차로 약 1시간 떨어진 외곽도시 와실라의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이곳은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13일 방문해 유세했던 곳으로, 트럼프 지지 성향이 강한 곳이다. 이름을 밝히길 거부한 한 남성은 고물가에 관한 생각을 묻자 “물가는 다시 하락하고 있다. 조 바이든 때는 더 비쌌다”고 말했다. 이번 선거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가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무슬림들을 이 나라에서 몰아내는 것”이라고 했다. “그들은 기독교 국가인 미국의 정체성에 어울리지 않는다. 당신이라면 히잡을 쓰고 싶겠는가”라고 되물었다.
자신의 이름을 엘이라고 밝힌 한 남성은 누구에게 표를 던졌느냐고 묻자 “트럼프를 찍었다”고 답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지하는 설리번 후보를 찍었다는 뜻이다. 그는 “나는 공산주의에 반대한다. 공화당이 아무리 못해도 내가 민주당에 표를 주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노스슬로프 유전지대에서 일하는 에너지 기업 직원 대릴도 “알래스카가 민주당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투표하러 나왔다”면서 “알래스카가 가진 천연자원의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려면 석유·가스 개발을 지지하는 공화당이 계속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펠톨라 후보도 석유·가스 개발을 지지하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펠톨라는 원주민 출신이라 신뢰가 가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설리번·펠톨라 후보는 오차범위 내 접전을 벌이고 있다. 정치분석기관 쿡정치보고서는 알래스카 상원 선거를 ‘초접전’으로, 버지니아대 정치연구센터의 선거 예측 매체 ‘사바토의 크리스털볼’은 ‘민주당 경합 우세’로 각각 분류했다.
현재 상원 의석은 공화당 53석, 민주당과 민주당 성향 무소속 47석으로, 민주당이 다수당 지위를 탈환하려면 공화당 의석에서 4석을 가져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노스캐롤라이나·메인·아이오와 등 공화당이 차지하고 있는 지역에서 승리해야 한다. 여기에 전통적인 공화당 텃밭인 알래스카에서도 이긴다면 민주당의 상원 탈환에 힘이 실릴 수 있다. 고물가와 이란 전쟁에 대한 불만이 ‘트럼프 심판론’으로 이어지는 가운데, 위기감을 느낀 트럼프·공화당 지지층이 막판에 얼마나 결집하느냐가 주요 변수다.
알래스카는 유권자가 후보들에게 선호 순위를 매겨 투표하는 선호투표제를 채택하고 있다. 1순위 개표에서 과반 득표자가 나오지 않으면 최하위 후보를 탈락시키고, 그 후보에게 투표한 유권자들의 2순위 표를 해당 후보에게 넘겨 다시 집계하는 방식이다.
알래스카 선거관리 당국은 중간선거 본투표일인 11월3일에서 보름이 지난 뒤 순위별 추가 집계를 시작할 예정이어서 이번 상원 선거의 최종 승부가 가려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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