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나온 유럽의 반성 ‘판 아크 보고서’ [송성훈칼럼]

더 커진 美·유럽 생산성 격차
AI 기술보다는 확산에서 크게 밀려
자본·노동시장 규제부터 풀어야
AI혁명발 생산성 폭발도 가능
전 세계 거시경제 정책 방향을 가늠하는 두 축의 행사가 있다. 보름 전 열렸던 미국 잭슨홀 미팅과 6월 말 포르투갈에서 개최된 신트라 포럼이다.
둘 다 매년 주요국 중앙은행 총재와 경제학자, 금융시장 전문가, 언론인들이 모여서 글로벌 경제 진단과 통화정책 방향을 논의하는 행사다. 전자는 미국 중앙은행(정확히는 캔자스시티 연방준비은행)이, 후자는 유럽중앙은행이 주최한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올해 포럼은 미국과 유럽이 처한 경제 상황과 고민의 방향이 얼마나 엇갈리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줬다. 인공지능(AI) 혁명에 대한 입장에서 특히 그랬다.
취임 100일을 맞아 잭슨홀에서 데뷔 무대를 가진 케빈 워시 미 연준 의장은 미국 경제만큼이나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그는 견조한 미국 경제 성장을 이끄는 핵심 동력으로 AI발 민간설비 투자의 폭발적 증가를 꼽았다. 2021년 이후 가장 높은 9%를 기록했는데, 민간설비 투자 증가의 절반 이상은 AI 관련이라고 분석했다.
반면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 총재는 연설문 어디에서도 AI나 신기술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유럽이 직면한 구조적 변화의 중심은 AI 혁명이 아니라 수십 년 만에 최대 규모로 늘어난 방위비, 탈탄소 에너지 전환, 그리고 지정학적 공급망 무기화에 대한 대응이라고 진단했다.
미래 생산성 제고보다는 외부 충격에서 유럽의 시스템을 보호하는 방어적 자원 배분에 초점을 맞춘 연설이었다. 라가르드 연설은 곱씹을수록 유럽의 답답한 구조적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2018년 이후 미국과 유럽의 시간당 실질GDP 증가액 차이는 7배나 되는 상황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신트라 포럼에서 발표된 바트 판 아크 논문은 인상적이다. 2년 전 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 총재가 쓴 유럽 경제에 대한 처절한 반성문인 ‘드라기 보고서’의 후속 격이다.
지난 10여 년간 미국과 유럽 생산성의 급격한 격차 확대에 따른 위기의식은 같지만, 원인과 해결책에서는 좀 더 진전했다. ‘판 아크 보고서’는 유럽 위기를 단순히 최첨단 혁신 부재나 총투자 부족으로만 보는 시각을 반박했다.
유럽 생산성 증가를 가로막는 핵심 걸림돌 3가지를 제시했다. 자본시장의 한계로 기업 규모를 키우는 데 실패했고, 파편화된 규제가 기술 확산을 가로막고 있으며, 기업의 수용 역량 부족으로 첨단기술을 실제 생산성 향상으로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57개 산업을 비교 분석한 결과 유럽 생산성 정체의 근본적 원인은 신기술 ‘확산(diffusion)’에서 미국에 밀렸기 때문이라고 규정했다. 첨단기술을 개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대다수 일반기업과 서비스 현장에서 새로운 기술을 쉽게 흡수·활용할 수 있게 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주장이다.
지난주 세계지식포럼에서 에릭 브리뇰프슨 스탠퍼드대 교수가 주장했던 내용과 정확하게 겹친다. 브리뇰프슨 교수는 “(생산성이 폭발하려면) 업무 프로세스를 재설계하고, 인력을 재교육하는 등 무형 자산에 더 투자해야 한다”고 수차례 강조했다.
한국이 뜨끔해야 할 내용도 있다. 판 아크 보고서는 유럽의 상품과 노동, 그리고 자본시장의 규제와 자원 재배치의 경직성을 생산성 부진의 주원인으로 꼽았다. AI는 업무 자체와 과정을 송두리째 바꾸는 혁신인데 경직적인 노동시장 규제는 실제 도입 자체를 원천적으로 막아버린다. 세계 최초의 AI법 제정도 규제 우선주의로 해석되면서 기술 경쟁의 발목을 잡아서다.
유럽은 유연하지 못한 이념과 전임 정권 정책 결정자들의 오판에 대한 가혹한 심판을 받는 느낌이다. 문제는 그 고통을 평범한 국민들이 뒤늦게 나눠서 짊어진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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