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모야가족회, 모야모야병 환우·가족 지켜온 25년 [건강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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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를 너무 고생시켜서 가족 상담을 시작했다’는 한국모야가족회 조상제 대표의 닉네임은 ‘은비사랑’이다. 은비를 향한 사랑이 지금은 아빠의 또 다른 이름이 됐고, 우리나라 모야모야병 환우들의 투병과 삶의 여정을 돕는 따뜻한 조언자로 환우들과 가족들 곁에 있다. 모야모야병은 양쪽 뇌혈관의 내벽이 두꺼워지면서 일정한 부위가 막히는 특수한 뇌혈관 질환이다.
딸을 원했던 조 대표는 은비가 태어났을 때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그래서 하나뿐인 딸도 세상 부러울 게 없이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1998년 은비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담임 선생님의 전화를 받고 급히 학교로 달려갔다. 교실에 들어서니 딸아이는 책상에서 꼼짝 못하고 울기만 했고, 선생님이 여러 번 말을 걸어도 대답을 못했다.

지금은 희귀난치성 뇌혈관 질환인 모야모야병의 진행으로 뇌혈류량이 저하되면서 언어장애가 오고 입과 다리가 마비됐다는 것을 알게 됐지만, 그때는 왜 그런지 몰랐다. 여러 병원도 다녀봤다. 어떤 곳에선 다리 운동을 시키라 했고 다른 곳에선 꾀병이라고, 또 다른 병원에선 성장통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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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초등학교 2학년 때는 여름에 나타난 오른쪽 신체 마비 증세가 이틀이 지나도 풀리지 않았다. 두려움에 대학병원에 가서 여러 가지 검사를 한 후에 모야모야병을 진단받았다. 수술해야 한다는 의료진의 말에 두 차례의 뇌수술도 진행했다. 2차 수술에서 은비는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이후 재활치료 과정에서 조 대표는 뇌 가소성을 이용한 재활치료 논문을 접하게 됐고, 모야모야병의 증상이 수술만으로 완화되는 게 아니라 뇌과학적 접근으로 치료를 완성해나가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손상된 뇌는 살릴 수 없지만, 지속적으로 자극을 줘 손상된 뇌 주변의 신경망을 회복해 기능을 대체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후 최신 뇌과학 연구를 계속 공부하며 수술적 치료 이후 환자 개인에게 맞는 일상 관리와 가정간호 치료가 계속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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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대표는 여러 차례 모야모야병의 시그널이 있었으나 아무 의심 없이 방관했던 자신과 희귀난치성 질환에 무지했던 의사들, 그리고 부족한 정보로 인해 딸아이가 병으로 겪는 아픔보다 더 큰 아픔을 겪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는 자기와 딸아이처럼 불행한 사태에 놓이는 가족이 없어야겠다는 마음으로 직장을 다니며 한국모야가족회를 만들고 가족들과 전화 통화부터 시작했다. 환우회가 아닌 가족회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모야모야병이 혼자서는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질환이란 의미를 담았다. 환자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 모두가 함께 겪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2002년에 시작해 올해로 25년째, 한국모야가족회엔 짧은 병원 진료로는 해소되지 않는 의료적 궁금증은 물론 투병 환자를 보살피는 가족들의 어려운 사정까지 모야모야병 환자가 있는 가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안에 관한 질문과 답변이 점차 쌓였다. 모야모야병은 환자마다 증상과 예후가 다 다른 백인백색, 천인천색인 탓에 조 대표는 직장을 퇴직한 2012년 본격적인 개별 가정 상담도 시작했다. 한 가정과 8시간 이상 상담한 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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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비는 모야모야병 발병 후 14년이 지난 지금, 국문학 석사가 됐다. 부모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고군분투하면서도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즐겁게 살아가려 노력하는 어른이기도 하다. 지속적인 재활치료 덕분에 겉보기엔 멀쩡하나, 평생을 뇌병변 장애인으로 살아내야 한다.
그런데 은비처럼 고차뇌기능장애를 지닌 희귀질환자에 대한 지원제도가 우리나라엔 없다. 일본에선 고차뇌기능장애인 지원법을 올해 4월1일부터 시행했다는데, 우리나라도 희귀질환자를 위한 별도의 복지제도가 필요한 시점이다. 현재도 희귀질환 가족은 200여만 명에 달하고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전망인데 더 늦기 전에 국가 차원의 준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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