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걱정하는 습관 탓에 못 쉬는 우리…걱정조차 부지런한 내게 ‘쉼’을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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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아포칼립스 장르를 자주 본다. 문명이 무너지고 생존자 몇명만 남은 작은 세상, 모든 연락망이 끊겨 신호탄이나 연기로 소식을 전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기묘하게도 현실보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어떻게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세상을 보며 안도감을 느낄까?’ 그 이유를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재난이 닥치면 삶의 우선순위가 강제로 정리되기 때문이다. 아포칼립스 세계에서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생긴다. 내 경력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 투자 공부를 해야 하는지, 에이아이(AI)를 얼마나 알아야 하는지, 집을 살 수는 있을지, 나만 뒤처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런 고민이 한꺼번에 쓸려 내려가고, 폐허에 몇채 남지 않은 집처럼 삶의 질문도 몇개만 남는다. ‘오늘 먹을 것이 있는가. 잘 곳이 있는가. 내 옆의 사람이 안전한가.’ 삶은 훨씬 위험해졌는데, 역설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명확해진다.
나는 종종 삶에 지칠 때마다 푸념처럼 하는 말버릇이 있다. “그냥 다 같이 농경사회로 돌아가서 농사짓고 살았으면 좋겠다.” 이 말은 단순히 귀농하고 싶다는 뜻이 아니다. 그 안에는 ‘세상이 내가 이해할 수 있는 크기였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이 담겨 있다. 지금의 사회는 살아가기 위해 알아야 할 것이 너무 많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고, 어제 배운 것은 금세 업데이트된다. 국제 정세는 쉼 없이 흔들리고, 쏟아지는 정보 가운데 무엇이 사실이고 가짜인지 분별하는 일조차 쉽지 않다. 공부하기에는 벅차고, 모르기에는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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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처럼 내가 싫었던 날은 없다’의 초반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당신이 부정적인 마음이 자꾸 드는 건 부정적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삶에서 매일 바라보고 있는 것들이 당신을 힘들게 하는 것들이어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손바닥만 한 화면 하나로 전세계를 바라본다. 전쟁부터 기후 위기, 쏟아지는 범죄와 가파르게 오르내리는 경제까지. 예전에는 마을 밖에서 일어난 일을 모르고 하루를 살아도 됐지만, 지금은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사건이 오늘 나의 삶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7평짜리 방 한칸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 너무 큰 세계가 들어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우리가 끌어안고 사는 것은 먼 곳의 일만이 아니다. 사라질지도 모르는 직업과 노후 준비처럼 아직 만나지도 않은 문제들이 오늘의 나에게 미리 도착한다. 한가지 기술을 익혀 평생 먹고사는 시대는 저물어가고 있다. 한때 안정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화이트칼라 직종조차 인공지능의 등장 앞에서 흔들린다. 어느 것 하나 장담하기 어려운 미래를 생각하다 보면, 나는 역설적으로 먼 미래가 없는 아포칼립스 세계가 부러워진다. 내게는 세계 전체와 남은 인생 전부가 아닌, 오늘의 몫만 감당해도 되는 삶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오늘의 몫만 살아낼 수 있을까. 어디까지를 오늘의 몫이라고 정할 수 있을까. 오늘 해야 할 일을 정하려면 결국 어디로 가고 싶은지, 언제까지 가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목표로 삼을 기준이 계속 변한다면 오늘을 정하기 위해 또다시 내일과 다음달, 몇년 뒤를 헤매야 한다. 결국 오늘에 집중하기 위해 미래를 생각해야 하는 이상한 모순에 빠진다.
이런 고민으로 머리가 아파질 때면 나는 ‘일단 하라’는 말을 붙잡는다. 몸을 일으켜 밖에 나가고, 커피 한잔을 마시고, 해야 할 일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를 시작했다. 실제로 작은 행동 하나가 다음 행동을 데려오는 날도 많았다. 집 밖으로 나왔다는 사실만으로 작은 용기가 생기고, 카페에 앉았다는 이유로 책 한장이라도 펼치게 되는 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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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일단 하는 것’에는 한도가 있다. 겨우 몸을 일으켜 짜낸 용기로 축축한 지하실에서 기어 나왔는데 또 무너지는 일이 반복되면 어느 순간부터는 다시 올라가는 일 자체가 두려워질 수 있다. ‘어차피 애써도 결국 다시 여기로 돌아올 텐데.’ 기대했다가 실망하는 일이 반복되면 사람은 실패보다 기대하는 일을 먼저 포기하게 된다.
이 책을 만난 날도 지하실에 떨어진 마음을 겨우 끌고 나온 날이었다. 눈을 뜨고 집 밖으로 나오기까지 무려 세시간이 걸렸다. 북카페 구석에 자리 잡고 이런저런 책을 뒤적였지만, 평소라면 손이 갔을 ‘나를 끌어올려 줄 만한 제목’들이 하나도 반갑지 않았다. 그러다 마치 내 마음을 그대로 옮겨 적은 듯한 제목의 책, ‘오늘처럼 내가 싫었던 날은 없다’를 골라냈다. 나는 페이지를 넘기다가 한 문장 앞에서 오래 머물렀다.
“쉬고 난 후에도 의지가 돌아오지 않을까 걱정이라면 그 걱정은 내가 미래를 걱정하는 습관 때문에 쉬지도 못하고 계속 걱정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쉬다 보면 다시 무언가를 시작하고 싶은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쉬세요.”
나는 이 문장을 노트에 옮겨 적고 곧바로 집으로 향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쉬는 일에도 꽤 그럴듯한 이유를 붙인다. “요즘 너무 바빴으니까”, “번아웃이 온 것 같아서 재충전하려고.” 한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광고 문구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처럼 휴식조차 열심히 살아낸 뒤에야 주어지는 보상처럼 여길 때가 있다. 한국 사회에서 부지런함은 오랫동안 미덕이었다. 그러나 그 미덕은 때때로 이상한 죄책감을 남긴다. 나는 걱정조차 쉬지 않고 부지런히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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