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 반란, 이번엔 끝내자”…요즘 젊은 세대가 중세를 소환하는 이유 [이윤정 기자의 소소월드]
SNS 갈무리
말을 탄 기사들이 긴 창을 겨누며 돌진한다. 그런데 말 대신 타고 있는 것은 공유 전동자전거다. 창도 나무가 아니라 플라스틱 파이프다. 영국 런던 동부의 공원에서 벌어진 이 기묘한 결투는 중세 기사의 마상 창 시합을 현대적으로 비튼 행사다. 갑옷을 입은 팝스타, 명품 패션쇼에 등장한 사슬 갑옷, 600여 년 전 농민 반란을 내건 티셔츠까지. 지금 영국 대중문화에서 중세가 뜻밖의 방식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요즘 서구 젊은 세대 사이에서 중세 패션이 유행하고 있다. 중세를 뜻하는 ‘메디벌(medieval)’과 특정한 미학이나 유행을 가리키는 ‘코어(core)’를 합친 ‘메디벌코어(medievalcore)’가 패션계의 새로운 흐름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영국 런던에서는 최근 중세 기사의 마상 창 시합을 본뜬 이색 행사가 열렸다. 예술가 잭 카든(24)이 기획한 행사로, 참가자들은 말 대신 공유 전동자전거를 타고 창 대신 플라스틱 파이프를 든 채 서로를 향해 돌진했다. 관람은 무료였다. 고가의 입장료와 폐쇄적인 미술 시장에 대한 대안적 성격을 띤 행사로, 현대미술 행사인 프리즈 아트페어가 열리는 시기에 맞춰 진행됐다. 카든은 영국 일간 가디언에 “프리즈는 비싸고 접근하기 어렵다”면서 현대미술의 문턱을 낮추기 위해 기획한 행사임을 밝혔다.
중세를 끌어온 것은 거리 예술만이 아니다. 미술은 물론 음악과 패션으로도 확산하고 있다. 호주 출신 팝스타 트로이 시반은 신곡 ‘파티’ 뮤직비디오에서 사슬 갑옷을 입은 중세 기사로 등장했다. 전투에서 승리한 뒤 성에서 벌어지는 축제에 합류하는 모습이다. 엄숙한 기사도보다는 과장된 몸짓과 관능적이고 유희적인 분위기를 앞세워 중세의 이미지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SNS에서 유행하고 있는 중세코어.
패션계에서도 중세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지방시, 루이비통, 막스마라 등 주요 브랜드의 패션쇼에는 중세 수도복을 연상시키는 두건과 사슬 갑옷에서 영감을 얻은 디자인이 등장했다. 중세의 복식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는 현대적인 실루엣과 소재를 결합해 새로운 스타일로 풀어낸 것이다.
중세풍은 성별과 몸에 대한 기존의 규범을 비트는 방식으로도 활용된다. 가디언은 여성의 성적 욕망과 자유분방한 태도를 드러내는 흐름을 ‘웬치코어’라고 소개했다. ‘웬치’는 원래 젊은 여성을 뜻했지만, 역사적으로 하녀나 문란한 여성, 매춘부를 가리키는 경멸적 의미로도 쓰였다. 하지만 이제 웬치코어는 이 단어를 활용해 얌전하고 단정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여성상에서 벗어나, 자신의 욕망과 개성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태도를 강조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
“농민 반란을 끝내자”…중세에서 찾은 반항의 상징
중세 열풍을 단순한 복고 패션으로만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도 있다. 그 이면에는 기득권과 권위에 대한 반감이 자리 잡고 있다.
영국 예술가 코빈 쇼는 런던에서 열린 현대미술 행사 프리즈에 맞춰 ‘바보들의 축제’라는 전시를 열었다. 중세 유럽에서 기존의 위계와 권위를 뒤집고 조롱하던 축제에서 착안한 행사다. 쇼는 패션 잡지 GQ와의 인터뷰에서 이 전통을 부자들을 비판할 수 있었던 평민 계층의 축제로 설명했다. 미술 시장과 부유층 중심의 문화 행사를 비틀려는 의도가 담겼다.
스포츠 뱅거 티셔츠에 ‘1381년 농민 반란, 이번에는 끝내자’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상품 페이지 갈무리
의류 브랜드이자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디자인으로 알려진 스포츠 뱅거는 티셔츠에 ‘1381년 농민 반란, 이번에는 끝내자’라는 문구를 넣었다. 1381년은 영국에서 농민 반란이 일어난 해다. 당시 농민과 노동자들은 세금 부담과 사회적 불평등, 지배층의 억압에 맞서 봉기했다. 오늘날의 티셔츠는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재의 불평등에 대한 불만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활용된다.
이런 분위기는 대중문화 작품에서도 나타난다. 배우 앤드루 가필드가 출연한 영화 ‘더 업라이징’은 14세기 영국 농민 반란을 소재로 삼았다. 영화는 당시 평민들이 지배층에 맞서 평등을 요구했던 역사를 오늘날의 권력과 저항 문제에 연결해 바라보게 한다.
영국 런던대 역사연구소의 중세사 선임강사 사이먼 트래퍼드는 “중세는 과거에 갇힌 시대가 아니라 언제나 현대 문화 속에 존재해 왔다”면서 “다만 시대마다 사람들이 중세에서 끌어오는 요소와 그것을 활용하는 방식이 달라진다”고 가디언에 설명했다. 옥스퍼드대 영문학과 교수 매리언 터너는 “현대 예술가와 패션 디자이너들이 중세를 차용하는 방식에는 기쁨과 유희가 담겨 있다”며 “이들이 중세를 활용하는 것은 당시 사회를 정확하게 재현하기 위해서라기보다, 과거의 이미지와 상징을 빌려 새로운 상상력을 펼치기 위해서”라고 분석했다.
팬데믹 이후의 불만, 중세 농민 반란과 닮았다?
그렇다면 젊은 세대는 왜 지금 중세를 소환할까. 터너 교수는 중세 유럽에서 흑사병이 확산한 뒤 나타난 사회 변화에 주목했다. 인구 감소로 노동력이 부족해지면서 임금이 오르고 사회적 이동성이 커졌으며, 이러한 변화는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이어졌다. 1381년 영국 농민 반란 역시 흑사병 이후 세대의 불만과 연결해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터너 교수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사람들이 과거처럼 부당한 상황을 참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유사성이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물론 중세의 흑사병과 현대의 팬데믹을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큰 사회적 충격 이후 사람들이 기존의 질서와 규칙을 다시 바라보게 된다는 점에서는 비교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기술 변화에 대한 불안도 중세를 다시 바라보게 하는 요소로 꼽힌다. 터너 교수는 인쇄술이 등장하던 시기와 인터넷·인공지능(AI)이 급속히 확산하는 오늘날 사이에도 비교할 만한 지점이 있다고 봤다. 대규모 기술이 개인의 창작 활동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과거와 현재에 모두 존재한다는 것이다.
중세의 이미지는 국가 정체성을 둘러싼 논쟁에서도 활용된다. 영국에서는 중세의 역사와 상징이 때로 민족주의나 우파 정치의 언어로 사용돼 왔다. 하지만 최근의 청년 문화에서는 이런 상징을 다른 방식으로 되찾으려는 시도도 나타난다. 영국의 지배층을 비판하면서도 영국의 역사와 문화에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는 식이다.
문화 분석가 브리짓 돌턴은 가디언에 젊은 세대의 중세풍 유행을 두고 “세인트 조지의 십자가를 내걸지 않고도 영국에 관해 이야기하는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잉글랜드 국기인 세인트 조지의 십자가는 최근 반이민·극우 시위에서 사용되면서 정치적 의미를 둘러싼 논란을 빚었다. 국기를 내거는 행위가 단순한 애국심의 표현을 넘어 특정 정치 세력에 대한 지지로 읽히기도 하는 상황이다. 돌턴의 말은 젊은 세대가 국기나 민족주의 구호 대신 중세의 역사와 상징을 활용해 영국의 정체성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물론 중세는 하나의 정치적 입장으로만 해석되지 않는다. 중세의 상징은 극우 정치인에게도, 기득권에 저항하는 사람들에게도 각기 다른 의미를 제공한다. 프랑스 극우 정치인 마린 르펜은 잔 다르크를 기독교적이고 전투적인 정체성의 상징으로 내세울 수 있다. 반면 좌파 성향의 사람들은 1381년 농민 반란에서 불평등과 권력에 맞선 저항의 의미를 찾는다. 트래퍼드는 “사람들이 각자의 주장에 맞는 중세의 장면을 선택할 수 있다며, 좌파적 가치에 부합하는 사회상 역시 중세에서 찾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중세는 멀고 낯선 과거지만, 오늘날의 젊은 세대에게는 오히려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 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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