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리한 구석] 부처님은 왜 TV 속 자신을 보고 있을까···세종에서 만난 백남준
백남준 ‘자화상’이 세종시 비엔날레 전시관 입구에 전시되어 있다. 박경은 선임기자
믿음이 없어도 이상하게 마음이 고요해지는 순간들. 먹고 마시며 다니다가 마주치는 뜻밖의 성스러움. 거창하지 않아도 일상에 숨어 있는 작고 거룩한 순간들을 만나봅니다.
얼마전 세종시에 갔다가 재미있는 전시를 구경했어요. 세종 중앙공원에 있는 비엔날레 전시관인데 전시명이 ‘세종과 남준’이에요. 웹툰 제목 같기도, 드라마 제목 같기도 하더라고요. 세종시니까 앞에 나온 세종은 알겠는데 뒤의 남준을 보고 살짝 갸웃했어요. 혹시 BTS의 RM인가. RM의 본명이 김남준이니까요.
전시장에 들어가니 비로소 의문이 풀렸습니다. 세종과 남준은 각각 세종대왕과 아티스트 백남준을 뜻했습니다. 입구에는 세종대왕의 어진과 백남준의 자화상이 걸려 있었어요. 백남준의 자화상은 무척 흥미롭습니다. 그의 예술세계와 삶의 방식을 한데 집약해 보여줍니다. TV모양의 선글라스를 쓰고 입술을 꾹 다문 남자의 데드마스크가 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주변엔 온갖 물건이 널려 있어요. 그랜드피아노 모형위에는 한자 혁(革)자가, 지구본에는 명(命)자가 쓰여 있고 구겨진 종이와 각종 물건이 보입니다. 데드마스크 왼쪽 아래엔 작은 불상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평생 음악과 미술, 기술과 동서양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아티스트답게 얼굴 하나만으로 자신을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자화상 왼쪽 아래 거꾸로 앉아 있는 불상을 보니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TV부처’가 떠올랐어요. 부처가 TV 모니터를 마주하고 앉아있는 바로 그 작품이지요. 예전에 경기 용인 백남준아트센터에서 ‘TV부처’를 본 적이 있는데 세종시에서 만난 작품은 모습이 조금 달랐어요.
백남준의 ‘TV 부처’ (2001년작)가 세종시 비엔날레 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다. 박경은 선임기자
알고보니 ‘TV부처’는 하나가 아닙니다. 백남준은 불상과 TV, 카메라라는 기본 구성으로 재료와 형태를 달리해 여러 버전을 만들었어요. 용인에서 본 것이 돌로 만든 불상이었다면 이곳의 불상은 목조였습니다. 청동으로 만든 버전도 있습니다. 카메라가 부처를 찍고 그 영상을 바로 앞의 TV에 실시간으로 내보내는 구조인 이 작품에서 가만히 앉아 있는 부처는 화면 속 자신의 모습을 계속 바라보고 있습니다. 예전에 처음 이 작품을 접했을 땐 좀 모순적인 듯한 모습에 웃음이 나오기도 했어요. 부처님이 TV에 빠져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다니 말입니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것과 끊임없이 움직이는 영상. 오래된 불상과 당시의 첨단 미디어.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함께 있는 모습이 의외로 잘 어울립니다. 다양한 생각과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이 작품이 던지고 있는 여러 질문 가운데 하나는 ‘자아성찰’이지요. 재미있는 장치도 있습니다. 부처가 보고 있는 화면을 들여다보려고 관객이 몸을 기울이면 TV에는 부처 뿐 아니라 관객 자신의 모습도 잡힙니다. 부처를 구경하던 사람이 작품 안으로 들어가버리는 셈인데, 이같은 관객 참여 역시 백남준이 의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TV부처가 갑자기 튀어나온 아이디어만은 아닙니다. 백남준은 일찌기 선(禪·Zen)을 예술 속으로 끌어들였어요. 1962년 독일 비스바덴의 플럭서스 공연에서 그는 작곡가 라몬테 영의 ‘직선을 그리고 그 선을 따라가라’는 지시를 독특하게 실행했습니다. 잉크와 토마토 주스가 들어있는 통에 자신의 머리를 담갔다가 이를 붓처럼 사용해 긴 종이에 선을 그은 퍼포먼스 ‘Zen for head’가 그것입니다. 이듬해 내놓은 ‘Zen for TV’는 더 기발합니다. 모니터에 가느다란 한 줄의 선만 남은 먹통 TV를 고치는 대신 그대로 작품으로 삼았습니다. 그에게 ‘선’은 절이나 명상실 안에만 머물지 않았어요. 머리로 선을 긋고, 고장난 TV에서 선을 발견하고 급기야 부처를 TV 앞에 앉혔습니다. 오래된 선불교의 이미지와 생각을 당대의 공연과 기술 속으로 끌고 들어갔습니다.
잠시 백남준의 작품에 정신이 팔려 있다 문득 궁금증이 들었습니다. ‘세종대왕과 백남준 사이엔 무슨 공통점이 있길래?’ 하는 것이지요. 전시를 기획한 세종시문화관광재단 측은 시대는 달라도 두 사람 사이엔 공통점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미디어를 통한 세상과의 소통이라는 것입니다. 세종대왕은 한글이라는 새로운 문자 미디어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뜻을 표현하고 전달할 길을 열었습니다. 백남준은 TV라는 전자 미디어를 예술로 끌어들여 세계와 소통하는 방식을 실험했습니다. 두 사람을 소통이라는 말로 한자리에 불러낸 것이지요. 엉뚱하게 느껴졌던 두 인물의 이름이 한 전시장에 있는 이유가 그제야 이해됐습니다. 이 전시는 다음달 8일까지 이어집니다.
백남준이 1962년 머리를 붓처럼 사용해 종이에 선을 긋는 퍼포먼스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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