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들은 굴복하지 않았다, 사주는 굴복했다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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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공화당의 대통령선거 후보 경선이 한창이던 2015년 7월, 워싱턴포스트(이하 포스트) 기자에게 트럼프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다음 버스를 기다려!” 자신의 연설 현장을 취재한 포스트의 기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전용기 승객용 버스 탑승을 막은 것이다. 또 다른 포스트 기자는 그 순간을 트럼프의 언론 전반을 향한 “울화, 불쾌감, 예민함”이 드러난 때로 기억했다. 이후 트럼프 1기 행정부(2017∼2021) 내내 언론과 기자를 향한 그의 공격은 꾸준했다. 지지자들이 이에 동참했음은 물론이다. 그 결과가 2021년 1월6일의 의사당 폭동이었다.
2013년부터 2021년까지 8년간 포스트의 편집국장을 지낸 마틴 배런은 대통령이 언론을 향한 혐오를 부추기고 민주주의를 위협하던 시기에 벌어진 일들을 ‘정치는 뉴스를 어떻게 위협하는가’에 담았다. 저자는 편집국장 취임 당시 이미 40년 가까이 현장을 경험한 베테랑 언론인이었다. 그는 보스턴글로브 편집장 시절, 가톨릭교회의 아동 성추행과 조직적인 은폐를 파헤치는 등 굵직한 탐사 보도를 이끌기도 했다. 이후 그 사건은 영화 ‘스포트라이트’로도 만들어졌다. 한국어판 부제처럼 트럼프와 언론의 관계를 ‘전쟁’으로 표현한다면, 그는 전쟁의 선봉에 서기에 적합한 인물이다.

책 곳곳에 나열된 트럼프의 언론관은 모욕적이고 위험하다. 그는 기자를 폭행한 정치인을 “강단 있는 사람”, “내 타입”이라고 칭찬했고, 왜 언론을 폄훼하냐는 질문에는 “여러분 모두의 신용과 위신을 떨어뜨리기 위해서죠. 그래야 나에 관한 부정적인 기사를 썼을 때 아무도 믿지 않을 테니까”라고 말했다. 편집국장(저자)에게는 “기사와 기사 작성자들을 비난”하는 트럼프의 전화가 걸려왔다. 언론인들은 자신의 “이마에 피에 젖은 총탄 구멍을 만화처럼 그려 넣은” 이미지를 마주하거나 “가스실에 있는 딸의 얼굴 사진을 받”아야만 했다. 완전히 새롭지만은 않은 이야기들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은, 베테랑 언론인의 글이 가진 구체성은 물론이거니와 윤석열 정부 시절 국내 언론이 처했던 현실이 연상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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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를 전면에 내세운 한국어판 제목과 달리, 원제를 직역하면 ‘힘(권력)의 충돌: 트럼프, 베이조스, 워싱턴포스트’다. 언론과 충돌하는 힘이 정치권력 하나일 수는 없다. 때문에 책은 자본권력과 언론, 나아가 자본권력과 정치권력 사이의 긴장도 중요한 축으로 삼는다. 저자가 편집국장에 취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1933년부터 80년간 포스트를 소유·경영해오던 그레이엄 가문은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에게 포스트를 넘겼다. ‘자본의 언론 소유’에는 본질적으로 불길한 면이 있기 마련이지만 저자는 베이조스를 긍정적으로 서술한다. 그는 “뉴스룸의 독립성에 마음을 쓰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고, 저자 역시 “그는 한번도 보도에 개입한 적 없다”고 단언한다. 포스트를 압박하려는 트럼프는 아마존으로 눈길을 돌리고 트럼프의 트윗이 “아마존 주가 하락을 부채질”하기도 하지만, 베이조스는 언론이 민주주의를 위해 중요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후보 트럼프의 부상부터 트럼프 1기의 마지막까지 지켜본 저자가 편집국장 자리를 내려놓을 때까지 내내 말이다.

미국에서 이 책이 출간된 건 2023년 10월. 3년의 시차를 두고 나온 한국어판은 서문에서부터 우울한 변화를 일러둔다. “이 책이 처음 출판된 2023년 이후 많은 것이 달라졌다. 그 가운데 단 하나도 바람직한 변화는 없었다.” 트럼프는 백악관에 재입성했고 무엇보다 베이조스가 바뀌었다. 포스트는 2024년 대선에서 특정 후보에 대한 지지 표명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아마존은 위기였고 베이조스의 또 다른 사업체인 우주 기술 기업 블루오리진은 정부와의 계약이 절실했다. 베이조스는 “공포에 굴복”했으며, 이는 그가 자신의 손으로 만든 저 유명한 포스트의 슬로건 ‘민주주의는 어둠 속에서 죽는다’의 “핵심 원칙을 배신한 행위”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다만 여전히 저자는 포스트가 훌륭한 보도를 이어가고 있으며 베이조스가 취재에 개입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고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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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트럼프로 대표되는 어둠 속에서 위기를 겪었고 포스트의 사주는 끝내 굴복했다. 언론과 언론인들은 대개 굴복하지 않았으나 미래에 관해서라면 그 무엇도 장담하기 어렵다. 객관성으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저널리즘 원칙은 편집국 내부에서조차 의문과 논쟁을 자아내고 있다. ‘대안적 사실’ 쪽에 선 대중에게 어떻게 닿을 것인가, 뉴스와 언론은 수익성을 담보할 수 있는가는 현재진행형 의문이다. 이 모든 불확실성 속에서 민주주의는 여전히 “언론에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만큼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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