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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October 9, 2026

밀항, 현해탄을 건너 이카이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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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27일 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에서 바라본 부관페리. 권성우 제공
지난 6월27일 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에서 바라본 부관페리. 권성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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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6월27일 저녁, 시모노세키로 향하는 부관페리 갑판에서 부산항 야경을 바라보았다. 배는 밤 9시에 출항 예정이었다. 스무 번을 훌쩍 넘긴 일본행 중 배를 타고 간 건 처음이었다. 이 기행은 김시종 시인의 자서전 ‘조선과 일본에 살다’와 김석범 작가의 대하소설 ‘화산도’에 등장하는 밀항(密航)의 여정, 더 거슬러 올라가 관부연락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너간 이들의 마음 한 자락만이라도 이해하고픈 열망에서 비롯됐다. 이제는 세계문학의 지평에서도 주목받는 김석범과 김시종의 작품에 등장하는 밀항 장면은 유난히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김시종은 제주 4·3 시기에 제주 중앙우편국 방화 사건에 연루되었다가 1년여의 도피 생활을 거쳐 일본으로 밀항한다. 그는 “이것이 마지막, 마지막 부탁이다. 설령 죽더라도, 내 눈이 닿는 곳에서는 죽지 마라. 어머니도 같은 생각이다”라는 아버지의 간곡한 바람을 뒤로한 채 밀항선을 탄다.

고토 열도와 세토 내해를 거쳐 고베 해안에 상륙한 김시종은 가까스로 오사카행 기차에 오른다. 그가 기차에서 밀항자들을 적발하는 경관의 눈을 겨우 피할 수 있었던 건, 어머니가 방수포에 싸서 준비해 준 세루 천으로 지은 고급 학생복과 아베 지로의 책 ‘산타로의 일기’ 덕분이었다. 이 장면에서 여느 모험소설 못지않은 박진감과 생생한 현장감을 느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부모와 조국을 등지고 밀항선에 오른 김시종 시인의 초조하고 절박한 마음을 그린 대목은 ‘조선과 일본에 살다’의 압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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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12권의 ‘화산도’를 읽으며 가장 몰입한 대목은 역시 제주 4·3 당시 주인공 남승지와 강몽구가 밀항선으로 제주와 일본을 오가는 장면이었다. 이 여정에는 어머니와 누이를 일본에 남겨둔 채 홀로 새로운 조국 건설의 도정에 나선 남승지의 의지가 담겨 있다. 그는 일본에서 “도회지의 밝은 전등 불빛, 그 빛의 찬란함. 그곳을 떠나 굶주림과 위험에 노출된 어둠 속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제 나름대로 혁명을 생각하고 있고, 그렇지 않다면 누가 그런 곳에서 고생을 하겠습니까”라며 험난한 길을 선택한다. 결국 남승지는 시모노세키에서 밀항선을 타고 “조와 보리밥뿐인 세계”인 제주로 되돌아온다. 그러나 1946년 여름 일본으로 밀항한 작가 김석범에게 귀환은 오랜 세월 허락되지 않았다. 제주로 돌아가는 남승지의 선택에는 4·3의 참담한 비극을 전해 들을 수밖에 없었던 김석범의 문학적 자의식이 투영돼 있다.

해방 전후 현해탄을 건넌 이들의 밀항은 한국 현대문학과 예술에서 그 역사적 무게에 비해 충분히 형상화되지 못한 소재다. 하지만 이들의 이야기는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굴곡진 역사, 삶과 죽음, 절망과 희망, 디아스포라의 상처와 운명을 극적으로 되비춘다. 한·일 사이의 현해탄은 그렇게 오랜 세월 수많은 떠남과 귀환이 교차한 바다였다. 시인 임화는 일찍이 ‘현해탄’(1936)이라는 시편에서 “아무러기로 청년들이/ 평안이나 행복을 구하여/ 이 바다 험한 물결 위에 올랐겠는가?”, “청년들은 늘/ 희망을 안고 건너가/ 결의를 가지고 돌아왔다”고 적었다. 이 청년들의 결의는 김석범과 김시종의 행로에도 배어 있다. 그들은 각각 42년과 49년 만인 1988년과 1998년에야 비로소 조국을 방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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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27일 부관페리에서 바라본 부산 야경. 권성우 제공
지난 6월27일 부관페리에서 바라본 부산 야경. 권성우 제공

6월28일 이른 아침, 부관페리는 “한 많은 관부연락선의 발착지였던” 시모노세키에 도착했다. 항구에서 바라보니 간몬대교와 건너편 모지항이 보였다. ‘화산도’의 남승지가 탔던 밀항선도 모지와 시모노세키 사이의 간몬해협을 통과해 고베 인근으로 향한다. 시모노세키는 고대부터 한반도와 얽힌 역사적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조선통신사 상륙 기념비, 일청강화기념관 등을 둘러보고, 다음날 신시모노세키역에서 신칸센을 타고 오사카로 출발했다.

남승지는 시모노세키에서 급행열차를 타고 고베를 거쳐 어머니가 살고 있는 오사카 이카이노로 간다. 김시종은 밀항 직후 고베 해안가 기차역에서 오사카 우메다를 경유해 이카이노의 관문 쓰루하시역에 도착한다. 내가 탄 부관페리와 신칸센, 김시종과 남승지가 탔던 밀항선과 기차 사이에는 긴 세월의 간극이 놓여 있다. 이들이 목숨 걸고 건넌 밀항의 여정을 뒤늦게 따라간들, 한 책상물림 연구자가 그 절박한 마음에 얼마나 다가갈 수 있을까. 그래도 어떻게든 연구실과 책을 벗어나 이들이 체험한 길을 직접 보며 느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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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항을 통해 이들이 도착한 이카이노는 1973년에 사라진 지명으로, 현재 오사카 한인타운이 위치한 지역이다. 김시종은 ‘이카이노 시집’에서 이 지역을 “없어도 있는 동네/ 있는 그대로/ 사라지고 있는 동네”라고 읊었다. 이 시집을 읽다 보면 “멀어지는 사랑이 틈새로 엿보는/ 엷어진 마음”이 전해진다. ‘화산도’에서는 “이카이노에 살고 있는 조선인 청년들도 한 번쯤은 이카이노에서의 탈출을 시도”했다고 묘사되는데, 김시종은 이 지역에 대한 깊은 애정을 담아 “이카이노는 마음속이야”라고 노래한다.

7월3일에는 오사카의 한인타운 거리를 거닐었다. 비 내리는 날씨에도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김시종이 그러했듯이, 밀항한 사람들이 한인들의 도움으로 힘겹게 인생의 닻을 내렸던 이곳은 이제 일본에서 번성하는 한류 문화를 체감할 수 있는 명소로 거듭났다. 현재 제주대 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시간의 흔적, 거리의 기억’ 전시에서는 재일 사진가 조지현이 찍은 1960년대 이카이노 사진과 오사카공립대학 학생들이 찍은 같은 장소의 2024년 사진을 대조해 볼 수 있다.

임화의 시 ‘현해탄’의 마지막 문장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이 바다 높은 물결 위에 있다”는 올해 9월17일 재개관한 부산시립미술관 기획 전시 제목이다. 이 시구는 현해탄을 건너 일본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했던 이들의 마음을 담은 상징이기도 하겠다.

재일 한인 김성웅 감독의 다큐 영화 ‘아리랑 랩소디―바다를 건넌 할머니들’(2023)이 보여주듯이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의 다양한 곡절과 사연은 끊임없이 문학과 예술을 불러낸다. 이들의 상처와 마음에 깊이 다가갈수록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인간의 삶과 역사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리라. 우리는 아직도 이 바다 높은 물결 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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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성우 | 숙명여대 한국어문학부 교수. 문학평론가이자 한국문학 연구자. 지성의 힘과 감성의 매력이 잘 어우러진 글쓰기를 향한 소망을 간직하고 있다. 디아스포라 문학과 비평사, 문학적 에세이에 깊은 학문적 관심을 지니고 있다. ‘망명과 지성’, ‘비평의 고독’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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