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닥칠 것 알면서도 석유 시추…당신들이 원했으니까!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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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희정의 H열 15번 가능한 사랑 & 디거
최근 두편의 영화가 인상 깊었다. 이창동의 ‘가능한 사랑’과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의 ‘디거’다.
한편은 한국 해고노동자와 그 가족의 삶을, 다른 한편은 기후재난과 미국 석유 재벌 문제를 그린다. 두 작품은 서로 완전히 다르면서도 동시에 같은 질문을 공유하고 있다. 예술은 고통을 다룰 수 있는가, 그런 예술은 자본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그리고 자본은 그 고통과 어떻게 연루되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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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방식으로 독보적인 아름다움을 빛내는 두 작품을 굳이 비교할 필요는 없겠지만, 지면이 허락한 비평의 재미를 누리면서 한 작품을 선택한다면, 나는 ‘디거’ 쪽이다. 이창동은 예술가의 순진함을 냉소하고 그 진정성을 의심한다면, 이냐리투는 예술과 관객, 그리고 자본의 공모 관계를 질문한다. 누가 더 관객에게 잔인한가 하면, 역시 후자다.
우선 ‘가능한 사랑’. 이 작품은 2009년 쌍용자동차 옥쇄파업 당시 노동자들에게 가해진 끔찍한 국가폭력의 기억을 되살리며 노동이 불가능해진 시대에 사랑을 말할 수 있는지 질문한다. 여기에서 ‘사랑’은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겠지만, 나는 ‘예술’의 다른 말로 읽었다. 다큐멘터리 감독인 예지(조여정)는 해고노동자인 호석(설경구)과 아내 미옥(전도연)을 기록하면서 그들을 “사랑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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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사랑은 예지의 의지와 달리 남편 상우(조인성)가 말하는 것처럼 “메소드 연기”가 되어버린다. 노동자의 삶을 기록하겠다며 어디든 침범하는 카메라는 때로는 순진하고 때로는 탐욕스럽다. “이창동은 다큐멘터리를 모른다”는 평가가 나오는 건 이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는 예지에 대한 묘사가 현장에서 활동하는 다큐멘터리 감독에 대한 모욕이라 느낄 법도 하다.
한편 상우는 진보적인 태도를 패션으로 여기는 자본가다. 이창동은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을 고집하는 예지와 그런 예지를 기특해하는 상우 사이의 차이보다는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상우는 노동자의 ‘처지’를 안다는 환상을 통해 계급적 우월감을 즐기고, 예지는 노동자의 ‘고통’을 기록한다는 오해 속에 자신의 예술적 진정성을 증명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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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이창동은 야만적인 자본과 기만적인 예술을 동시에 바라본다. 예지는 한명의 다큐멘터리 감독이라기보다, 세상의 비참 앞에서 무기력한 예술을 비추는 거울인 셈이다. 더 나아가 그것은 이창동 자신에 대한 반성문처럼 읽힌다.
‘디거’는 마가(MAGA,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시대를 끝의 끝까지 풍자하는 소동극이다. 막이 오르면 거대한 저택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석유 재벌 디거 록웰의 모습이 보인다. 아침부터 그린란드 석유 시추 설비에 균열이 생겨 메탄가스가 새어 나온다는 보고가 들어오지만, 그는 그냥 무시해버린다. 그 탐욕의 대가는 메탄가스 폭발과 거대한 빙붕의 붕괴. 워싱턴디시 크기의 다섯배에 이르는 얼음덩어리가 유럽을 향해 떠내려오는데도, 그는 자신의 설비가 입은 피해부터 계산한다.
3일 후면 유럽 대륙의 절반이 물에 잠길 상황이지만 이에 대응하는 미국 대통령과 각료들의 태도도 별반 다르지 않다. 트럼프를 떠올리게 하는 콤슨 대통령에서부터 그 옆에서 ‘하나님의 뜻’ 운운하는 극우 목사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마가를 비아냥거리는 익숙한 블랙코미디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냐리투는 이미 있는 이야기를 반복하는 지루한 감독이 아니다. 그는 어느 순간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관객이 올라선 테이블을 뒤엎어버린다. 지금까지 본 장면은 명배우 커티스 마크슨(톰 크루즈)이 ‘디거’로 출연하는 연극의 리허설 장면이었음이 밝혀지는 것이다. 이 순간부터 이냐리투의 카메라는 무대 뒤 현장과 무대 위 재현을 정신없이 오가면서 이야기를 밀어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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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서는 다소 과도해 보였던 인물 묘사가 ‘사실’이 아니라 ‘허구’라는 사실에 어쩐지 안도했다. 트럼프에 대한 우스꽝스러운 묘사가 극우들의 또 다른 반발을 불러올까 봐 이미 피곤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안심을 틈타 이냐리투는 다시 한번 테이블을 돌린다. 이 연극은 이미 20여년 전에 일어난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었다!
지금/여기를 그리던 블랙코미디가 갑자기 어마어마한 규모의 재난 이후를 살아가는 근미래의 시간 속으로 점프한다. 그곳에서 재벌은 자신이 망친 세계를 살아가는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연극을 제작한다. 그렇게 우리는 깨닫는다. 우리 시대에 소위 ‘예술’이란 자본가가 인민에게 허락하는 ‘아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국제법정에 선 디거는 말한다. “나는 이런 재난이 닥칠 것을 알고 있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왜냐고? 당신들이 내가 멈추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록웰의 석유 시추 덕분에 ‘우리’는 저렴한 가격으로 자동차를 타고, 에어컨을 틀고, 에이아이(AI·인공지능)의 손쉬움을 누릴 수 있다. 손가락질은 쉽지만, 편안한 삶을 포기하는 건, 아무래도 불가능하다. 자본과 소비자가 석유 시추에 공모하여 거대한 재난을 초래하고 있는 셈이다.
이 결탁은 예술 상품으로도 이어진다. 자본과 예술이 재난을 향유의 대상으로 만들고, 예술과 관객은 함께 고통을 길들인다. 영화 초반, 자신의 저택에서 디거는 거울을 본다. 이 거울은 반대편 거울을 비추면서 거울 안에 거울이 끝없이 펼쳐진다. 거울 장면은 이 겹겹의 공모가 빚어낸 미장아빔(극중극)을 고도로 양식화한 상징이다. 그렇다면, 비평은 자유로운가? 그럴 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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