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에게 타인이었던 가족, 그 안에서 겪은 ‘세계고’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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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혜가 다시 만난 여성
사업차 중국에서 파나마로 온 조부 장씨는 상하이에 본처를 두고 현지인 여성과의 사이에서 아버지 카를로스를 낳았다. 중국계 파나마인이라는 정체성을 지녔지만 태어나자마자 상하이로 가 중국인 어머니 손에 자랐으니 그의 모어는 아마도 중국어였을 것이다. 그러나 10살에 중국의 정치적 격변을 피해 다시 파나마로 보내지고 1년 만에 친어머니를 잃었다. 그 사이 중국에 남은 가족은 모두 일본군에 살해당하고 파나마에 홀로 남은 카를로스는 삼촌을 따라 미국으로 이주한다. 미국인이 되면서 그는 아버지의 성인 ‘장’을 떼어내고 오히려 낯설었을 어머니의 스페인계 성을 선택하는데, 이로써 그의 정체성은 한층 복잡하고 수상쩍은 겹겹의 타자성을 두르게 된다. 아버지 카를로스는 본격적인 미국 시민이 되기 위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연합군의 승전 이후 적국이었던 독일에 주둔하면서 금발에 파란 눈이 인상적인 어머니 크리스타를 만난다. 두 사람은 첫딸을 낳은 뒤 1948년 미국으로 돌아오고 3년 후 작가 시그리드 누네즈가 태어난다.

긴 시간이 흘러 작가가 된 딸은 사라진 조각이 훨씬 많은 퍼즐을 맞추듯 부모의 생을 더듬어본다. 미국인으로 살면서도 끝내 영어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아버지는 살면서 여러번 자신이 순수한 중국인이었길 바랐을 것이다. 어머니는 딸들이 자신처럼 순수한 독일인이었으면 하고 바랐다. 작가는 수 브라운 같은 이름을 타고난 순수한 미국 소녀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이름은 순수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가족은 미국 사회에서 순수하지 못한 타인이었고 서로에게도 타인이었다. 언젠가 어머니는 독일어에서 영어로 바꿔 말할 수 없는 중요한 단어가 너무 많다며 ‘욕망을 충족하지 못한 개인이 자아와 세계 사이의 모순 때문에 느끼는 고통’을 가리키는 ‘벨트슈메르츠’라는 단어를 예로 든다. 우리말로 ‘세계고’ 정도로 옮길 수 있는 이 단어는 어쩌면 이 가족이 내내 느껴온 감정을 가장 가깝게 표현한 말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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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유년을 “머리 위에 칼이 매달려 있는 기분”으로 규정한 작가는 복잡한 세상에서 단순하고 명료한 발레의 세계로 도망친다. 그곳은 균형과 대칭, 운동, 형태, 순수한 마음, 의지가 깃든 곳이고 신의 숨결에 날리는 깃털처럼 가볍고 아름답게 최선을 다하면 되는 세계다. 그러나 본래 도피는 영원한 상태로 머무를 수 없고 작가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 언어와 국가와 문화와 계급의 경계를 넘나들며 러시아 이민자 남성과 불온하지만 치열한 사랑에 빠진다.
각기 따로 쓰고 발표한 네편의 소설이 한권의 책으로 묶이면서 타인 사이에서 태어나고 자란 여자아이가 어떻게 어른이 되고 작가가 되었는지 보여주는 아름다운 회고록이자 자전적 서사가 되었다. 여느 위대한 데뷔작이 그렇듯이 시그리드 누네즈의 이 첫 책 역시 자신을 에워싼 태생적인 ‘세계고’를 집요하고도 서늘하게 해부하고 들여다본 설득력 뛰어난 한편의 탐구서이다. 우리에겐 다소 늦게 당도했지만 1995년 처음 출간되었을 때 현지 독자들은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또 한명의 믿음직한 작가의 탄생을 예감하고 신의 숨결보다는 조금 더 무거웠을 공감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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