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도 평생 숨겨온 보육원에서의 그 7년 [금자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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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국가권력에 의해 ‘프락치’로 몰려 구원받지 못한 채 북으로 간 국회의원들. ‘금자’는 소녀 금자의 시선을 따라 70년이 훌쩍 넘은 그 시간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대한민국 친위쿠데타와 내란의 기원을 마주한다. 월화수목금 연재.
“그러면 중고등학교는 어디서 나오셨어요?”
“아, 그건 함안 할아버지 집에서.”
“어느 학교 다니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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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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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강금자 여사님과의 첫 만남에서였다. 1·4후퇴 피난길에서 놓친 동생을 찾은 이야기를 하다가, 바로 20대 시절로 건너뛰었다. 청소년기가 비었다. 그 어려운 환경에서 중고등학교는 다녔는지, 다녔다면 어느 지역이었는지를 물었다. 여사님은 ‘함안’이라고 답했다가 구체적인 질문이 이어지자 멈칫했다. 나는 무심하게 다른 질문으로 넘어갔다.
“사실은, 아산 보육원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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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까 함안이라고 한 건 둘러댄 말이에요.”
“그렇군요. 근데 왜.”
“딸한테 여태 보육원에서 지냈다는 말을 못했어요. 사위한테도 못했고요. 동생들도 저랑 똑같이 숨겼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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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시작한 지 두 시간여 만에 여사님이 갑자기 진실을 고백했다. 아파트 거실 탁자에 음료수를 준비해준 딸이 일을 본다며 나간 뒤였다. 충남 아산시 도고면 기곡리 보육원에서 7년 가까이 살았노라고 했다. 그곳에서 4남매가 모두 학교에 다녔다는 거였다. 보육원 출신. 그것은 여사님이 평생 숨겨온 주홍글씨였다. 이렇게 갑자기 드러내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명동 집에서 간발의 차이로 놓친 6살 동생 호완이를 뒤쫓아 남으로 내려가던 금자 남매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자.
금자는 안양역에서 잃어버린 호완이를 찾기 위해 천안삼거리에서 목적지인 부산을 포기하고 서울로 되돌아왔다. 호완이는 전날 나타나 옆집 양산가게 여주인에게 “누나를 찾으러 남쪽으로 간다”는 말을 남겼다고 했다. 금자는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한강을 건너 처음 피난 갔던 길을 다시 밟았다. 단 한 명의 동생도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집념만이 머리를 채웠다. 일주일 만에 다시 천안까지 갔지만, 허탕을 쳤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휩싸인 12살 금자와 8살 호각은 땟국물로 찌든 옷가지와 행색이 말이 아니었다. 때는 1951년 1월15일 전후로 추정된다. 애초 목적지인 부산이라는 선택지도 있었다. 과연 호완이는 부산을 향해 갔을까? 그때 기적처럼 명동 이웃집에 살던 여자아이가 나타났다.
“금자 언니 아니에요? 호완이 잃어버렸죠?”
10살이 채 안 된 동네 여자아이가 반갑게 아는 체를 했다. 호각이 또래였다. 아이의 말에 따르면, 호완이는 전날 ‘누나 찾아달라’면서 천안삼거리 앞의 파출소로 들어갔다. 복장이 특이했다. 미군 군복을 입고 납작한 베레모까지 쓰고 있었다고 했다. 부리나케 파출소를 찾아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부모 잃은 아이들로 북적였다. 순경에게 인상착의를 설명하니 “도고온천에 있는 보육원에 보냈다”고 했다. 내일도 아이들을 태워 그곳에 보낼 테니, 그때 함께 가면 만날 수 있다고 했다. 금자 남매는 파출소에서 정해준 숙소에서 하룻밤을 잔 뒤 다음날 ‘쓰리쿼터’라 불리는 미군 트럭에 몸을 실었다.
드디어 보육원에서 상봉한 호완은 “누나”라고 한마디를 하더니 한참을 울기만 했다. 호완이 그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안양역을 코앞에 두고 달구지 바퀴가 하나 빠져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됐다고 했다. 한데 마침 안양역에서 폭발 사고가 나 천지가 진동하는 듯 흔들리고 불길이 치솟았다는 거였다. 거기까지 달구지를 끌고 와준 서울 혜명보육원의 소사 부부는 달구지도 버리고 고향인 전라도를 향해 떠났다. “누나 잘 찾아가라”는 말을 남긴 채.

당시의 안양역 폭발사고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안양시가 기록한 ‘안양 시사’를 보면 “(1·4후퇴) 무렵에 안양역 화물열차 폭발사고가 발생하여 다수의 인명 피해가 발생하기도 했다. 항간에는 군수물자를 실은 화물열차가 남쪽으로 갈 수 없게 되자 폭파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오기도 하나 의도적인 폭파인지 사고인지는 분명하지 않다”**고 나온다. 이때의 사고는 1977년 11월의 전북 이리역(현 익산역) 폭발사고를 능가하는 규모였다는 주장도 있다. 다이너마이트 등 고성능 화약을 실은 열차가 폭발한 전북 이리역 폭발사고 때는 반경 500m 이내 건물 9500여채가 파괴돼 9973명의 이재민이 발생하고, 사망자 59명, 부상자 1343명이 발생했다. 안양역 폭발사고의 경우 당시 일상적으로 벌어진 미군의 대규모 공중폭격 피해에 가려 묻혔을 수 있다.
호완은 폭발사고의 아비규환 속에서 누나와 만나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던 거였다. 또한 서울 명동 집에 갔다가 남쪽으로 오는 동안엔 미군 장교와 함께 지프를 타고 이곳저곳을 다녔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군복을 입히고 한참을 함께 다니다가 작전 때문이었는지 천안의 한 집에 맡기며 “찾으러 올 때까지 잘 데리고 있으라”고 신신당부했다는 것이다. 미군은 호완에게 군용 담요와 용돈까지 주고 갔다고 했다. 고아처럼 떠돌다 미군 고위 장교의 눈에 띄어 귀여움과 돌봄을 받았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천안의 민가에 맡겨진 지 하루 만에 돈과 담요 등을 모두 빼앗기고 쫓겨났다고 했다. 그리고 파출소를 찾은 거였다.
헤어진 동생과 감격스럽게 상봉한 보육원의 이름은 ‘충남후생원’이었다. 이곳은 한국전쟁 전후 천안·아산 등에서 전쟁고아 등을 수용·보호하기 위해 운영되던 아동시설이었다. 한국전쟁으로 발생한 고아가 10만명에 이를 때였다.*** 금자 남매가 계속 여기에 머물 이유는 없었다. 작은 오빠와 약속한 대로 부산의 고모부 집으로 가야만 했다. 원장 선생님은 극구 말렸다. ‘전쟁 중인데 부산을 지금 어떻게 가겠다는 거냐. 곧 휴전되면 내가 연락해서 보내주마’고 했다.
원장 선생은 방까지 따로 줄 정도로 금자 남매를 끔찍이 아껴주었다. 다른 원생들에게 ‘특별 대우’라는 질시를 받을 정도였다. 학교도 보내주었다. 금자와 호각, 호완은 도고온천국민학교에 들어갔다. 금자는 중학교 갈 나이였으나, 전쟁통에 국민학교 졸업을 못 한 상태였다. 나중에 호완과 호기도 이 학교에 입학했다. 금자는 내내 호기를 등에 업고 학교에 갔다.
원장 선생은 1년도 안돼 구호물자 횡령 혐의로 경찰에 잡혀갔고, 지서 주임이 원장으로 왔다. 함안으로 못 간 금자는 결국 보육원이 있는 아산에서 중고등학교까지 다녔다. 온양중학교와 온양여고였다. 고등학교 땐 등굣길에 30리길을 걸었다. 우산과 우비가 없어 비가 오면 쫄딱 맞았다. 그나마 하교할 때는 시간이 맞는 장항선 열차를 타고 올 수 있어 나았다. 온양온천역에서 타고 선장역(도고온천역)에서 내렸다. 등하교가 너무 힘들어 2학년까지만 다녔다. 대학 갈 엄두는 못 냈다.
금자 남매는 ‘명동 남매’로 통했다. 동생들은 서울 중심가에서 놀았다는 자부심이 강했다. 호각은 반항적인 기질이 다분해 친구들과 주먹 다툼이 잦았다. 호완은 공부를 잘했다. 호기는 온순했다. 그런데 동생들은 단 한 번도 아버지 어머니에 관해서는 묻지 않았다.
함안에 가야 했다. 작은 오빠와는 부산에서 만나 전쟁이 끝나면 함안으로 가기로 돼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라졌으니, 할아버지에게 몸을 의탁해야 했다. 그러나 함안에는 아무리 편지를 보내도 답이 없었다. 큰오빠 호걸은 잘 살고 있을까? 1·4후퇴 때 작은 오빠 호주는 4살 호림이를 데리고 피난을 잘 갔을까.
<다음 회에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 당시 천안삼거리 앞에 있던 파출소는 천안 동부파출소(현 동남경찰서 산하 원성파출소)로 보인다.
** ‘안양 근대사 산책’(이동헌 ‘안양 사람들의 한국전쟁 경험’, 안양문화원, 2017)
*** ‘6·25전쟁사8-중공군 총공세와 유엔군의 재반격’(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1)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추적한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과 유해발굴을 통해 한국전쟁의 상흔을 드러낸 ‘본헌터’를 썼다. 그밖의 지은책으로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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