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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September 6, 2026

파도 앞에서 [서울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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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들은 초점이 맞지 않던 눈동자가 또렷해져서 어느새 주변의 모든 것을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보고 있다. 사진은 글의 내용과 직접적 관련 없음. 클립아트코리아
아기들은 초점이 맞지 않던 눈동자가 또렷해져서 어느새 주변의 모든 것을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보고 있다. 사진은 글의 내용과 직접적 관련 없음. 클립아트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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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운 | 부산 엠비시 피디

4년 전 가을, 처음으로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그 후로 불안과 우울은 파도처럼 자주 오고 간다. 거센 비바람과 함께 정신없이 몰아칠 때가 있는가 하면, 언제 그랬냐 싶게 잔잔하고 고요할 때도 있다. 어느 날은 이 반복되는 파도가 너무 지겨워 못 견디겠다가도, 어느 날은 이만하면 쓸 만한 풍경이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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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요즘, 살림이 쌓이고 화분이 시들어 간다. 집채만 한 파도가 몰려오고 있다는 전조다. 어제는 열흘 만에 상담사 선생님을 만났다. 눈물 젖은 휴지 한 움큼을 만들고 나서야, 실은 어떤 파도든 언젠가는 지나간다는 사실을 겨우 떠올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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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센 파도가 올 것 같은 때에도 잠깐 웃음을 터뜨리게 되는 순간은 있다. 귀여운 고양이 영상이나 아기 영상 같은 것들. 작년 말부터 친구들이 연이어 아이를 낳은 덕분에 화면 너머로 귀엽고 작은 얼굴을 만나는 일이 잦아졌다. 아이들은 어찌나 빨리 자라는지. 초점이 맞지 않던 눈동자가 또렷해져서 어느새 주변의 모든 것을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보고 있다. 그 애들이 앞으로 마주할 처음은 얼마나 무궁무진할까. 그런 생각을 하면, 녀석들의 동그란 뒤통수를 가만가만 매만져주고 싶다.

아기들의 반짝이는 두 눈을 보다가, 처음 앞에 선 마음에 대해 생각한다. 불안과 우울을 안고 사는 내게 처음은 설렘이나 호기심보다 걱정이나 긴장, 두려움과 가까운 말이다. 처음 앞에서는 자꾸 주눅이 든다. 쭈그러진다. 새로운 경험이 가져다줄 기쁨과 재미, 배움에 대한 기대는 걱정과 불안에 빠르게 잡아먹힌다. 머릿속에서는 자동적으로 상상이 이어진다. 뭔가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르는, 누군가에게 민폐를 끼치거나 곤란을 겪고 있는 내가 그곳에 있다. 상상이 현실이 되는 걸 막기 위한 계획을 세우다 보면, 뭘 하기도 전에 진이 빠지기 일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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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름엔 회사에서 처음으로 해보는 드라마 연출 업무를 맡게 됐다. 회사 생활을 한 지도 꽤 시간이 흘렀지만, 새로운 프로젝트를 할 때마다 아주 처음부터 시작하는 기분이 든다. 게다가 드라마는 정말이지 한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분야다. 함께하는 동료들에게 기대어 고군분투하며 애를 쓴 한달이었다.

처음 앞에서 가장 괴로운 건 걱정과 불안보다 스스로를 견디지 못하는 나 자신이다. 새로운 경험에 풍덩 뛰어들지 못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자꾸만 힘들어하는 나를 질타하는 말들이 머릿속에서 쉼 없이 쏟아져 내린다. 내 취약함을 알면서도 그런다. 내가 던진 가혹한 화살을 맞다 보면, 멈춰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소용돌이처럼 돌고 도는 자기비하의 늪에 갇히게 된다. 집채만 한 파도가 당장이라도 덮칠 것만 같은 순간.

아직 만나지 못한 처음들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지금껏 경험해 온 세상은 이 세상의 몇퍼센트나 될까. 아직 맛보지 못한 음식, 가보지 못한 땅, 만나본 적 없는 사람과 해본 적 없는 일을 헤아리다 보면 삶이 아주 짧은 것처럼 느껴진다. 개척자의 마음으로 용기 있게 모든 처음에 기꺼이 몸을 던지는 사람이 되고 싶지만, 아마도 나는 매번 주춤하게 될 것이다. 차마 도망은 치지 못하고 울상을 지은 채, 어떻게든 처음의 순간을 통과하려고 애쓰고 있을 것이다.

그런 내게 좀 더 다정해질 수는 없을까 생각한다. 처음 앞에서 얼어붙은 나를 안쓰러워할 수는 없으려나. 호기심으로 빛나는 눈을 한 아기의 뒤통수를 매만져 주고 싶은 마음을 나 자신에게도 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당장은 바꿀 수 없지만, 오고 가는 파도 속에서도 작게나마 마음을 키우다 보면 언젠가 스스로에게 다정한 백발의 할머니가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런 상상을 하며, 파도가 지나가길 기다리는 밤이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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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oskNews shows a cleaned-up reading view extracted from the publisher’s page — the original always lives on their site, not ou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