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는 왜 불평등한 현실의 위로가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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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44. 한국이 일본에 세 점 뒤진 상황에서 오상욱이 피스트에 올랐다. 펜싱 사브르 대표팀의 맏형 오상욱은 연속해서 상대를 찌르면서 45-44, 대역전극을 완성했다. 한 점만 더 내주면 끝났을 경기였다. 그런데, 뒤집혔다. 승리의 기쁨은 또 다른 흥분과 환희를 낳았다. 현실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을 목격해서였다.
오늘날 사회에서 ‘개천에서 용 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태어난 환경과 부모의 형편, 교육과 기회의 격차로 출발선부터 달라진다. 노력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노력만으로 그 아득한 간극을 좁히기는 어렵다. 출발선이 불공정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사회는 “더 열심히 하라”는 말만 되풀이한다. 사람들은 성공담보다 불평등을 먼저 목격한다. 누구에게는 튼튼한 사다리가 주어지고 누구에게는 그 사다리조차 보이지 않는 게 우리가 직면한 현실이다.
하지만 스포츠에는 적어도 정해진 경기 시간과 점수판이 존재한다. 현실의 불평등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어도, 경기장 안에서만큼은 동일한 규칙으로 승부를 겨룬다. 앞선 점수는 유리함일 뿐 승리의 보증수표가 아니며, 뒤진 점수는 불리함일 뿐 패배의 확정이 아니다. 오상욱의 막판 4연속 득점은 “포기하지 않으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진부한 증명이 아니었다. 결과가 결정되지 않은 1~2초의 짧은 시간 동안, 한 번 더 움직일 가능성이 남아 있음을 보여준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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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도 이준환의 동메달은 그 희망을 조금 다른 결로 보여줬다. 그는 지난해 왼쪽 무릎 인대가 파열돼 긴 재활을 거쳤고, 올해는 오른쪽 무릎마저 다쳤다. 양 무릎을 제대로 굽히기 힘들어 주특기인 빗당겨치기와 업어치기를 쓰기 어려운 상태였다. 강력한 우승 후보라는 기대 속에서도 결승 진출에는 실패했다. 동메달 결정전 연장전에서는 상대에게 절반을 빼앗겨 패배 직전까지 몰렸으나, 비디오 판독 결과 판정이 취소되며 귀중한 기회를 다시 얻었다. 그 순간 그는 굳어버린 무릎 대신 무릎대팔꺾기를 시도해 한판승을 거뒀다.
이준환의 메달을 단순히 ‘부상을 이겨낸 투혼’으로만 포장해서는 안 된다. 그의 몸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당초 목표했던 최선의 결과도 얻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남은 조건 안에서 다른 길을 찾아 최선의 승부를 했다. 잃어버린 것과 부족한 것을 껴안은 채 다음 선택을 내렸다. 불공정한 출발선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어쩌면 이런 감각일지 모른다. 완벽한 조건을 갖춘 뒤에야 비로소 시작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선택하고 시도할 수 있다는 감각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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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서는 애쓴 만큼 보상받지 못하고, 한 번 놓친 기회를 다시 얻기도 힘들다. 기대와 결과 사이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늘 제한적이다. 스포츠 역시 이러한 현실의 한계를 대신 없애주지는 않는다. 오상욱의 역전이 모든 열세를 뒤집을 수 있다고 약속하지 않으며, 이준환의 동메달이 부상을 이겨내면 반드시 보상받는다는 신화가 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 장면들을 오래도록 기억하는 분명한 이유는 있다. 기울어진 승부 앞에서도 필사적으로 마지막 공격을 시도하는 사람, 익숙한 무기가 막혔어도 기어이 다른 길을 찾아내고야 마는 사람을 보며 일말의 희망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스포츠의 묘미는 모든 게 끝났다고 여긴 순간에도 다음 선택이 남아 있다는 데 있는지 모른다. 그 믿음이 경기장 안에서만 유효하다면, 우리는 환호가 끝난 뒤 다시 각자의 정해진 출발선으로 돌아가야 한다. 스포츠가 보여준 가능성이 경기장 밖에서도 더 많은 이에게 허락되는 사회를 꿈꾸는 것, 과한 바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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