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 창자 순대가 미식으로…‘와인이란 세계’를 만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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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이던 2010년, 나는 프랑스 리옹의 한 식당에서 처음 보는 요리를 앞에 두고 멋쩍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배낭여행 중 큰맘 먹고 주문한 정찬에 토끼 내장으로 만든 프랑스식 ‘순대’, 부댕’(boudin)이 등장한 것이다. 프랑스어가 서툴러 메뉴판에서 ‘토끼’란 단어만 알아보고 조리법을 숙지 못한 게 화근이었다.
그때 난 분식집 돼지 간도 못 먹을 정도로 음식 가림이 심했다. 그런데 낯선 허브 등으로 속을 채운 토끼 창자를 나이프로 썰어 먹자니 눈앞이 깜깜해졌다. 한입 베어 물자 육가공 특유의 비린 맛이 터져 나왔다. 물을 연거푸 들이켜도 가시지 않았다.
홀로 온 어린 이방인을 멀찍이서 지켜보던 지배인이 말을 걸었다. 이 고장 내장 요리는 레드와인과 함께 맛봐야 진가를 알 수 있단다. 소주로라도 입을 헹구고 싶은 심정이었던 터라, 근처 ‘코트뒤론’(Côtes du Rhône) 지역의 저렴한 와인 한잔을 청했다. 코트뒤론은 지명이기도 하지만 프랑스 정부가 공식적으로 지정한 와인 원산지 보호 명칭이다. 론강과 론 계곡 일대 넓게 펼쳐진 와인 산지에서 생산되는 와인의 통칭이다. 와인을 기다리며 ‘푸드트럭에서 케밥이나 먹어야 했나’ 하며 속으로 땅을 쳤다. 당시 리옹에서도 터키 케밥은 인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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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웬걸, 부댕은 와인과 만나자 전혀 다른 음식이 됐다. 와인에서 나는 후추나 계피처럼 화한 향신료 향들이 내장의 잡내를 누르고 고소함만 남겼다. 이어서 산딸기를 한움큼 씹어먹는 듯 농익은 과실 맛과 새초롬함이 입에 퍼졌다. 나무통에 숙성한 과실주의 알싸한 풋내도 창자 안의 로즈메리와 근사하게 어울렸다. 한잔의 와인이 목에 넘기기도 버겁던 요리를 미식으로 바꾸는 ‘킥’이 됐다. 술이라면 소주밖에 모르던 내가 와인의 세계에 발 디딘 순간이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도 나는 그 신기한 세계를 탐험했다. 아르바이트비가 들어오면 마트 와인 코너의 1만원짜리 와인들을 골라 저녁 식사 상에 올렸다. 파전에 막걸리가 아니라 산뜻한 소비뇽 블랑 품종 화이트와인을 곁들이고, 머릿고기에 소주 대신 떨떠름한 카베르네 소비뇽 품종 와인을 마시는 식이었다. 물론 숙련된 지배인의 추천을 받았을 때처럼 ‘정답’에 가까운 짝만 짓지는 못했다. 짭짤한 소시지구이에 달큼한 진판델 품종을 곁들였을 땐 짠맛과 단맛이 동시에 도드라져 둘 다 쉬이 넘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한잔의 와인이 음식 인상을 바꾸는 경험을 이어가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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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시도할 수 있는 음식과 와인의 ‘페어링’은 무궁무진했다. 세상엔 음식 종류만큼이나 와인이 다양한 덕분이다. 리옹에서 맛봤던 그르나슈 품종만 해도 프랑스 남동부에서는 마른 덤불 같은 구수한 허브 내음을 뿜지만, 이보다 덥고 건조한 스페인 아라곤에서는 강렬한 붉은 과실 향과 더불어 감초처럼 단 향신료 향을 피운다. 오늘 저녁도 나는 와인 한병을 꺼내 코르크를 뽑는다. 곁들이는 음식이 꼭 거창한 정찬이 아니어도 좋다. 집밥과 백반에도 즐길 만한 와인이 있고, 그 한잔이 평범한 끼니를 별미로 바꾸어 오감을 일깨우곤 한다. 드넓은 와인 세계의 일면을 매일 저녁 알아가는 뿌듯함은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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