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한 여름 소나기 닮은 호찌민 ‘도시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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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가지 종류의 국기를 만나는 여행지가 있다. 베트남 남쪽 도시 호찌민(호치민)에 가면 모양과 색이 다른 국기 세가지를 형상화한 기념품을 만난다. ‘베트남 혁명의 아버지’ 호찌민(1890~1969)이 1945년 ‘베트남 민주공화국’(북베트남)을 선포했을 때 공인한 국기와 1976년 남북이 통일된 뒤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을 선포하며 지금까지 쓰는 국기, 통일 전 남베트남에서 북베트남 정부의 지시를 받아 활동했던 ‘남베트남 공화국 임시혁명정부’의 국기, 이렇게 세가지다. 첫번째와 두번째는 붉은 바탕에 노란색(금색) 별 모양은 같지만, 차이가 있다. 전자는 통통하다. 호찌민은 별을 날카롭게 깎고 변형시켜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 국기로 삼았다. 국기 이름은 금성홍기. 세번째는 날렵한 별이 위쪽엔 붉은색, 아래쪽엔 파란색으로 그려져 이분화된 국기 가운데 얹어진 모양이다.

국기에도 현대사의 부침이 새겨진 데가 호찌민이다. 통일되기 전 사이공으로 불리며 대략 한 세기에 걸쳐 프랑스 지배를 받았던 베트남의 중심 도시다. 도시 곳곳에 유럽식 건물이 웅장하게 서 있는 이유다. 여기에 262m 높이를 자랑하는 마천루와 카페촌이 들어선 세련된 도시가 호찌민이기도 하다. 한국인이 선호하는 여행지 베트남은 호이안, 다낭, 후에, 사빠(사파), 푸꾸옥 등 고색창연한 고대 유적지와 자연이 손짓하는 여행지도 많지만, 이른바 ‘도시 맛’도 근사하다. 그 대표가 호찌민이다. 더구나 특급 호텔급 숙박료가 서울에 견줘 대략 50% 저렴한 편이다. 쌀국수 등 음식도 한국인 입맛에 잘 맞는데다 여행 경비도 부담이 적다. 베트남 돈 1만동이 한화로 대략 540원(8월18일 기준)이다. 생수 1~2병이나 길거리 간식 정도 가격이다. 지난 6일부터 이틀간 다닌 호찌민은 현대와 과거를 넘나드는 여행지였다.

층마다 개성 있는 카페로 변신한 60년대 건물 ‘더 카페 아파트먼트’
“한국에서 오셨죠? 이곳을 가려는데, 가보셨어요?” 응우옌후에 보행거리 인근에 있는 ‘더 카페 아파트먼트’ 건물 안엔 한국인들이 ‘응 커피’로 부르는 카페 ‘%아라비카’가 있다. ‘%’를 돌리면 한글 ‘응’과 유사해 보인다. 한국인의 재치다. 7일 이 카페엔 인도네시아, 중동, 한국 등에서 온 이들로 북적거렸다. 중장년 한국인 부부가 여행지 정보를 나누자며 말을 붙였다. 쏴솨쏴솨. 갑자기 쏟아지는 빗소리가 들렸다. 도시의 열기를 소나기가 지웠다. 이젠 호찌민이 서울보다 시원하다. 이날 서울 종로구의 낮 최고기온은 38도였는데 호찌민은 31~34도였다. 8월 호찌민 평균 기온은 최저 25도에서 최고 32도다. 폭염을 피해 더운 나라에 가야 하나. 피식 웃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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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비카가 있는 ‘더 카페 아파트먼트’는 별난 건물이다. 1960년대 지어진 이 9층짜리 건물은 통째로 놀이터다. 문화를 무기로 장착한 세련된 카페나 빈티지풍 숍, 수공예품점, 네일 숍 등 볼거리 넘치는 가게 수십개가 포진해 있다. 카페당 크기는 약 33.05㎡(10평) 남짓. 요즘 이 빌딩이 최고 인기다. 외관만도 눈을 뗄 수 없다. 가게마다 제 자랑을 하느라 발코니를 꾸몄기 때문이다. 밖에서 보이는 간판과 디자인은 생경하면서도 발칙한 상상을 하게 한다. 본래 군인과 공무원의 숙소였다고 한다. 이젠 젊은 호찌민을 상징하는 공간이 됐다.
1층에 도착하자 고민이 생겼다. 계단과 엘리베이터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엘리베이터는 요금을 받는다. 약 3천동. 한화로 약 160원이다. 좁은 계단을 골랐다. 건물의 곳곳을 제대로 감상하는 방법이다. 계단은 낡았다. 숨을 할딱이며 한층 한층 오르자 층마다 보물섬 같은 카페 등이 나타났다. 큰 재미다. 이 과정을 거쳐 들어간 데가 ‘응 커피’였다. 빗소리가 음악 소리 같고 커피 맛은 달곰했다. 너도나도 눈을 맞추며 인류애를 나눴다. 창밖에서 들이치는 소나기가 하나로 묶어줬다. 여행은 이방인을 친구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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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찌민은 카페 여행을 하기 좋은 데다. 카페가 넘쳐난다. ‘제이더블유(JW) 메리어트 호텔 앤 스위트 사이공’ 인근에도 발코니가 있는 ‘위미 스페셜티 커피 앤 티’(WIMI Specialty Coffee & Tea) ‘쭝 응우옌 레전드’(Trung Nguyên Legend) 등이 거리를 메우고 있다. 후자는 1996년께 영업을 시작한 베트남 대표 커피 브랜드다. 진한 베트남 재배 로부스타 원두 맛이 자랑거리다. 심지어 거리엔 노란색 옷을 입은 ‘응 커피’도 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이디야커피 같은 ‘하일랜드 커피숍’ 지점도 넘친다. 하일랜드 커피숍은 일명 ‘베트남의 스타벅스’로 불리는 베트남 최대 커피 프랜차이즈 브랜드다. 역사 여행지 통일궁(독립궁) 인근에도 노닥거리기 좋은 카페가 즐비하다. 여름 소리를 들으며 한가롭게 마시는 찬 커피는 그것 자체로 휴식이다.


더 카페 아파트먼트만큼 여행객을 매료시키는 데는 ‘응우옌반빈 책 거리’(Nguyen Van Binh Book Street)다. 전세계 여행객이 모인다. 약 100~200m 거리에 베트남 대표 출판사 낌동출판사(NXB Kim Dong), 냐남출판사(NXB Nha Nam) 등 20여개 출판사가 부스를 차리고 여행객을 맞는다. 독립 서점이나 소품 숍 등도 있다. 2016년께 ‘책’을 강조한 거리로 문 열었다. 베트남 최초 복합 책방거리란다. 쉼터용 의자도 조성돼 있고, 북카페도 있다. 울창한 나무는 그늘을 만든다. 거의 모든 가게가 ‘인스타그래머블’하다. 햇살이 아름다운 아침나절이나 조명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하는 해 질 녘 등 어느 때 방문해도 만족감이 높은 여행지다. 여기에 거리 위 하늘에 조성된 밧줄에 걸린 알록달록한 우산들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이틀간 세번이나 찾았다. 거리의 주인은 시간마다 바뀌었다. 수백번 찾아도 좋을 성싶은 여행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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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스트리트’로 정체성을 확정하기 아주 오래전인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이 거리는 ‘홍콩 거리’로 불렸다. 1897년엔 ‘카르디스’(Cardis)로 명명되었다가 1955년 ‘응우옌허우’(Nguyen Hau)로 불렸다. 2000년께 가톨릭 지도자이자 지식인이었던 응우옌반빈(1913~1995)의 이름을 따 지금에 이르렀다. 베트남 사람 열명 중 넷은 성이 응우옌이기에 흔하면서도 귀한 거리 이름이다.

우유 빛깔 통일궁, 핑크빛 떤딘성당 우아함 가득해
호찌민의 주요 역사 관광지는 동커이거리 일대에 모여 있다. 동커이거리는 화려한 빌딩과 명품 숍이 줄지어 있는 데다. 제일 먼저 가볼 만한 데는 통일궁이다. 입장료가 있다. 관람 범위에 따라 다소 차이가 난다. 외국인 어른 4만~8만동(약 2200~4300원), 아이는 1만~2만동(약 540~1천원)이다. 전기차를 이용할 경우 금액이 오른다. 베트남인은 이보다 싼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다. 아침 7시에 문 열어 오후 6시에 닫는다.
통일궁 앞은 직각의 도로가 감싸고 있는 울창한 숲이다. 숲을 닮은 오토바이 무리 사이를 뚫어야 했다. 신호체계가 잘 정비되어 있지 않아 걱정이 앞섰다. 신기한 건, 오토바이와 도로를 건너는 이가 엉키지 않는다는 점. 수도 하노이에 견줘 빵빵 경고음을 울리는 오토바이도 없었다. 통일궁은 잘 정리된 잔디밭과 그 가운데 들어선 건물로 돼 있다. 가로로 길게 뻗은 우유 빛깔 건물, 통일궁. 볼수록 우아했다. 이유가 있었다. 지은 이가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베트남 건축가 응오비엣투(Ngo Viet Thu, 1927~2000)였다. 이 건물엔 쓰라린 역사가 있다. 1868년 착공해 1873년 완공된 이 건물은 프랑스 식민 정부의 총독 관저였다. 프랑스를 쫓아낸 뒤인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 대통령 관저로 쓰였다. 1962년엔 베트남공화국을 전복하려는 쿠데타 시도로 폭격을 맞아 부서졌다. 4년 뒤인 1966년 응오비엣투가 현대 건축으로 재건했다.

이 건물이 감내해야 했던 역사의 부침도 마침내 마침표를 찍는 날을 맞았다. 1975년 당시 사이공을 함락한 베트남 민주공화국 탱크는 철문을 부수고 들어가 금성홍기를 꽂았다. 이날의 탱크가 모형으로 만들어져 궁 앞마당에 전시돼 있다. 꽁꽁 숨겨져 있던 역사의 현장은 1990년 처음 일반에 공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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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여행객이 한가롭게 노니는 건물이지만, 건축적 관점에서도 ‘작품’이다. 프랑스 건축가 르코르뷔지에의 건축 ‘빌라 사부아’와 ‘위니테 다비타시옹’을 연상시킨다. 서양식 현대건축의 선과 미학을 동양적 관점에서 풀어낸 건축물이다. 여기에 응오비엣투만의 위트가 구현됐다. 그는 풍수지리 개념을 도입했다. 공중에서 보면 건물은 행운을 뜻하는 한자 길(吉) 자를 떠올리게 한다. 화려한 접견실과 각종 도자기 등과 지하 벙커 등을 보며 현대사를 되새김질하기 좋은 여행지다. 한가지 재밌는 점. 이곳엔 에어컨이 없다. 높은 천장과 원형을 유지하는 통풍 설계로 온도를 조절한다고 한다.

최근 주의할 점이 생겼다. 지난 1일부터 상업용 촬영엔 최소 50만동에서 최대 1천만동 요금을 내야 하는 정책이 도입됐다. 7일 둘러보며 디에스엘아르 카메라를 들었다가 낭패를 봤다. 고작 한국 돈으로 2만7천원(50만동)이지만 가슴을 쓸어내렸다. 기념품 숍 방문은 여행의 팁. “이 별 보이죠? 왜 통통한지 아세요?” 직원이 베트남 국기에 대해 설명하며 구입을 권했다. 지금 국기의 별보다 두배는 뚱뚱한 별이 그려진 키링이 인기다.

프랑스풍 건물은 이곳만이 아니다. ‘사이공 중앙우체국’은 에펠탑을 건축한 귀스타브 에펠이 철골 설계를 했다. 아늑한 노란색 등이 돋보이는 호찌민 대표 여행지다. 들어서면 거대한 홀 안쪽에 호찌민 초상화가 걸려 있고, 양쪽 골목에선 기념품을 판다. 여행객들은 저마다 사연을 적은 편지나 엽서를 부친다. 건물을 나오자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렸다. 한국어다. 단체 여행 온 한국인이 한둘이 아니다. 바로 앞에 있는 노트르담대성당도 대표 여행지다. 1880년 완공된 19세기 말 고딕·네오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이다. 지금은 공사 중이라 출입이 제한된다. 하지만 성당 앞 길거리 정원에 거대한 성모상이 있어, 철근으로 싸인 채 수리 중인 성당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여기서 걸어 30여분 가면 일명 핑크성당으로 불리는 떤딘성당이 나타난다. 외관이 고급스러운 핑크색이다. 이들 성당은 미사 시간을 확인하면 들어갈 수 있다.



우리네 남대문시장처럼 각종 물건을 파는 벤타인(벤탄)시장과 호찌민의 프랑스풍 건물 중 가장 화려한 인민위원회(시청) 청사도 가볼 만하다. 호찌민박물관도 있다. 지금 베트남을 이해하려면 호찌민 일대기를 알아야 한다. 본명이 응우옌떳타인인 그는 평생 수많은 가명을 사용했다. 호찌민도 160개가 넘은 그의 가명 중 하나다. 베트남 독립 등을 주장하며 투쟁의 길을 걸었던 그에겐 당연한 선택이다. 우리 현대건설이 2010년 완공한 ‘비텍스코 파이낸셜 타워’도 명소다. 262m 마천루로 68층 규모다. 상점, 전망대 등을 갖췄다.



전쟁이 여행 상품이 되는 데가 호찌민이다. 호찌민 외곽 중 가장 인기 있는 여행은 도심에서 차로 2시간 정도 걸리는 데 있는 구찌터널 투어다. 베트남전쟁 당시 베트콩이 도심 공격을 위해 조성한 지하 요새다. 거미줄처럼 연결된 지하 3층 규모의 거대한 터널을 둘러보는 여행이다. 지상으로 연결된 통로는 흙과 나뭇잎 등으로 위장돼 있어 안내자가 없으면 찾을 수 없다.
베트남 현지인과 친구가 되면 자주 듣는 말이 있다. “나이가 어떻게 되나?” 서열을 따져보겠다는 의도가 아니다. 베트남 언어 체계 때문이다. 인칭 대명사가 모두가 친족 명사다. 다정한 관계 맺기를 하려면 나이를 알아야 한다. 호찌민 여행의 시작은 베트남어로 자신의 나이를 외우는 것부터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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