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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October 10, 2026

‘죽음’이 명사가 아니라 동사가 될 때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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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작가이자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1908~1986). 위키미디어 코먼스
프랑스 작가이자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1908~1986). 위키미디어 코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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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을 펼친다. 찾아야 할 단어는 명사 ‘la mort’(라 모르, 죽음)와 동사 ‘mourir’(무리르, 죽다)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아주 편안한 죽음’을 읽기 위해서다.

죽음은 보부아르의 여러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다. 작가는 ‘모든 인간은 죽는다’에서는 실존주의적 시선으로, ‘노년’에서는 사회적 관점으로, ‘작별 의식’에서는 사르트르의 마지막을 기록하며 지적 동반자로서 죽음을 응시한다. 그중에서도 ‘아주 편안한 죽음’은 사뭇 특별하다. 철학자이자 지성인 보부아르가 아닌, 죽음을 앞둔 엄마를 바라보는 딸의 목소리가 들리기 때문이다. 작가는 자신이 마주한 슬픔을 두고 이렇게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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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내 안에서 울고 있는 듯했다.”

보부아르 안에서 울고 있던 그 존재는 누구였을까. 그가 사르트르에게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얼굴을 엄마의 입에 포개놓고, 엄마라는 사람, 엄마의 삶 전체를 구현하고 있었다’고 말할 때, 포개진 입으로 들어오는 것은 ‘엄마’라는 타자다. 이 세계에 더는 머물 수 없는 타자를 자기 안에 들이는 것, 그것이 보부아르의 애도라면, 그의 안에서 울고 있는 이가 누구인지는 자명하다. 그의 안으로 들어온 어머니이자 그 어머니를 품어낸 또 다른 자신이 아니겠는가.

아주 편안한 죽음 l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강초롱 옮김, 을유문화사(2021)
아주 편안한 죽음 l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강초롱 옮김, 을유문화사(2021)

‘아주 편안한 죽음’은 지극히 사적인 애도에서 출발한 글이다. 이 고유한 상실의 기록이 절실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우리 모두 어머니를 잃었거나 언젠가 잃게 될 운명을 지닌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의 울림은 단순한 공감에 그치지 않는다. 여기에는 작가가 말하는 ‘살아낸 경험’, 즉 한 인간이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마주한 사건을 온몸으로 겪어내는 시간이 담겨 있고, 독자는 작가의 시간을 제 것처럼 살아낸다. 그렇게 누군가의 상실을 통과하는 일은 독자에게도 자기 경험의 한계를 넘는 또 하나의 사건이 되다.

그러나 이야기의 울림에도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 것은 책의 제목이다. ‘아주 편안한 죽음’이란 무엇인가. 고통스러운 순간이 빨리 지나가는 죽음? 혹은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채 찾아오는 죽음? 어떤 답을 내려도 이 질문은 불편하다. 망자는 자신의 죽음을 두고 결코 ‘편안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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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부아르의 시선을 빌리자면 애초에 편안한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죽음이란 한 개인에게 일어난 사건이자 부당한 폭력이라고 했다. 인간은 누구나 ‘무엇’ 때문에 죽는다. 질병이든, 사고이든, 쇠락이든. 우리 삶을 앗아가는 그 ‘무엇’이 그리 다정할 리 있겠는가. 그렇다면 어째서 우리는 죽음 앞에 ‘편안한’과 같은 수식어를 붙이려 하는 것일까. 망자를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이 죽음을 이해하고 견뎌야 하는 사람은 망자가 아니라 남아 있는 사람들이니까.

죽음 앞에 수식어를 걷어내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내게 묻는다면, 나는 하나의 이름을 말하고 싶다. 프랑수아즈 드 보부아르.

시몬 드 보부아르의 어머니, 프랑수아즈는 암 진단을 받고 수술대에 오른다. 부풀어 오른 배, 코에 삽입된 관, 욕창이 생긴 몸, 푸르스름한 피부색, 모공에서 흘러나오는 액체, 부스럼과 고름. 우리는 책장을 넘길 때마다 점점 더 훼손되어 가는 몸을 만난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살아 있는 몸이기도 하다. 고통만큼 살아 있음을 생생하게 증명하는 감각이 또 있을까.

프랑수아즈는 고통스러운 주사를 참는다. 그것이 자신에게 ‘좋은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 퇴원할 수 있는지’를 딸에게 묻는다. 퇴원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약을 끝까지 삼키려 노력한다. ‘죽음을 미뤄야 한다’고 말한다. 시몬 드 보부아르가 그에게 들은 마지막 말은 “죽고 싶지 않구나”였다. 아니다, 그 뒤로 한마디를 더 외친다. “숨이 막혀.” 이 임종의 언어가 내게는 ‘숨을 쉬고 싶어’로 들린다. 그는 마지막까지 숨을 쉬고 싶었을 것이다.

명사 ‘la mort’(죽음)는 주어가 되어 ‘찾아오다’ 같은 동사를 부린다. 죽음이 찾아온다. 시몬 드 보부아르, 프랑수아즈 드 보부아르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유효한 문장이다. 죽음이란 얼마나 보편적인 관념인가. 하지만 문학의 문을 통과하는 죽음은 보편성을 버리고 개별성을 입는다. ‘아주 편안한 죽음’은 ‘죽음이 찾아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프랑수아즈 드 보부아르가 죽어가는’ 이야기이고, 이 사건의 주체는 ‘프랑수아즈 드 보부아르’라는 유일한 존재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애도의 글쓰기는 죽음이라는 명사를 동사로 되돌려놓는다. 명사가 닫힌 결론이라면 동사는 시간과 변화를 품는다. ‘mourir’(죽다)는 한 존재가 생의 끝을 향해 온몸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며, 작가는 이 동사의 주어 자리에 어머니의 이름을 놓는다. 그것은 평생 자신의 이름으로 불려본 일이 별로 없었던 한 여자가 자기 이름을 되찾는 사건이며, 딸이 어머니의 삶을 죽음보다 더 크게 그린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프랑수아즈 드 보부아르의 지독한 고통과 훼손된 몸, 그럼에도 생을 포기하지 않는 욕망을 목격하며 질문하게 된다. 이것은 죽음의 이야기인가, 생의 이야기인가. 적어도 한가지는 분명하다. 시몬 드 보부아르가 어머니의 살아 있는 몸과 욕망을 증언했다는 것, 그렇게 죽음이라는 사건을 삶의 안쪽으로 끌어왔다는 것. 아마도 그것이 절대 편안할 수 없는 이 죽음 앞에서 우리가 그 어느 때보다 생을 더 절실하게 바라보게 되는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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