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안 울겠다고 약속해 놓고선… [금자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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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국가권력에 의해 ‘프락치’로 몰려 구원받지 못한 채 북으로 간 국회의원들. ‘금자’는 소녀 금자의 시선을 따라 70년이 훌쩍 넘은 그 시간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대한민국 친위쿠데타와 내란의 기원을 마주한다. 월화수목금 연재.
“안 울 자신이 있느냐고 어머니가 물었어요. 아버지한테 누가 보고 싶냐고 했더니 저를 얘기하시더래요. 그런데 울까 봐 못 데려가겠다고 하셨어요. 저는 안 울 자신이 있다고 했죠. 참으면 된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어머니는 ‘그리 쉽게 답하지 말고 아직 날짜가 있으니 잘 생각하라’ 하셨어요. 저는 끝까지 가겠다고 했어요. 결국 그날 어머니가 저만 데려갔어요. 오빠들은 다 학교에 간 날이었죠.”
여사님은 어머니에 관해 말했다. 그리고 아버지 이야기를 했다 어머니가 당한 그 사건은 아버지와 얽혀있다. 여사님을 은평구 진관동의 아파트에서 처음 만난 날이었다. 탁자 위에는 방문객을 위한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아이스 라떼가 놓여있었다. 기호에 맞게 선택하라는 여사님 따님의 배려였다. 나는 “둘 다 좋다, 먼저 고르시라”고 했다. 여사님은 손사래를 쳤다.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담긴 종이컵을 앞쪽으로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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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년 전의 이야기가 펼쳐졌다. 그날 여사님, 그러니까 11살의 금자는 어머니와 함께 법원으로 갔다. 집이 있는 명동에서 골목 골목을 지나 서울시청 앞을 거친 뒤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정동 방면으로 걸어가면 나오는 중구 서소문동 37번지 서울지방법원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경성지방법원으로 쓰이던 청사를 그대로 쓰고 있었다. 옆에는 서울고등법원과 대법원도 함께 있었다.*
1948년 5·10 선거에서 제헌국회의원에 선출된 아버지 강욱중은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몸이었다. 1949년 6월21일 노일환·김옥주·김병회·박윤원·황윤호 등 동료 의원들과 함께 헌병대에 의해 체포됐다. 그 앞과 뒤로 국회의원 체포가 이어졌다. 총 15명이었다. 구속영장 발부가 집행되지 않은 의원 3명까지 포함하면 18명이었는데, 이는 당시 국회의원 198명의 9.1%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아버지 강욱중은 7월11일 서울지검으로 송치된 뒤 30일 기소됐다. 재판에 넘겨진 것이다.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는 혐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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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버지의 얼굴을 보러 가는 길이었다. 7남매 중 금자는 유일한 딸이었다. 아버지는 국회의원이 되기 전에도 늘 금자를 끔찍하게 아꼈다. 목욕도 직접 시켜주었고, 밥 먹을 때는 금자와 따로 겸상했다.
“그때는 왜 그리 날씨가 추웠을까요. 서대문형무소 안은 더 추웠겠죠. 어머니가 면회 가실 때 바지저고리에 솜을 두둑이 넣어서 만들고 그 속에 쪽지도 넣어보내신다고 했어요. 나중에 여쭤보니 혹시라도 문제 될까 봐 쪽지는 못 넣으셨다고 하더라고요. 면회 갈 때마다 아버지가 ‘금자 보고 싶다’고 하셨지만, 어머니는 망설였던 거예요. 내가 울까 봐. 그날도 법원까지 걸어서 가는데 ‘지금이라도 자신이 없으면 돌아가라, 우는 모습 보이면, 안 데리고 간 것만 못하다’고 하셨어요. 저는 ‘절대로 울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또 맹세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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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강욱중과 동료 의원들에 대한 공판은 1949년 11월17일 처음 열렸다. 그리고 이듬해 2월4일까지 모두 열 네 번 진행됐다. 금자가 어머니 손을 잡고 법원에 간 날이 언제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첫 공판 소식을 전하는 동아일보 기사는 “이날 갑자기 추워진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방청객이 운집했다”로 시작한다. 그날은 11월17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법원에 도착하니 수감된 의원님 가족과 사모님들이 모여서 정보 교환을 하고 계셨어요. 저는 그 근처 큰 돌기둥에 기대어 버스가 오기를 기다렸지요. 조금 뒤 ‘법원’이라고 쓴 버스가 들어왔어요. 아, 저 안에 아버지가 계시겠구나 했어요. 아버지가 포승줄에 묶인 채 세 번째로 내리셨어요. 그런데 목에 감고 계신 수건이 연탄 배달하시는 분의 것처럼 새까맸어요. 어린 마음에도 ‘얼마나 추우셨으면 저렇게 걸레 같은 수건을 목에 두르시고 계셨을까’ 하는 생각에 울음이 터졌어요.”
안 울겠다고 했는데, 울음이 터졌다. 한 번 터진 울음은 아무리 진정을 해도 멈추지 않았다. 울 거면 돌아가라는 어머니 말씀에 참겠다고, 절대 안 울겠다고 했는데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법원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돌기둥에 기대어 그저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법정에 들어가셨던 어머니가 밖으로 나오셨어요. 그새 재판이 다 끝났다고 했죠. 아버지 목에 두르신 수건 때문에 울고 말았다고 실토했어요. 어머니는 아버지가 법정에서 방청석을 두 번이나 돌아보셨다고 했어요. ‘아마 금자가 오지 않았을까 한 것 같다’고 하셨지요. 얼마나 섭섭하셨을까요. 저를 보고 싶다고 했는데, 제가 꼭 올 줄 알았는데. 그날 이후 감옥에서 갑자기 나오실 때까지 아버지 얼굴을 볼 수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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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돌기둥 옆에서 울던 소녀는 아버지가 왜 재판을 받는지 자세히 몰랐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누명을 써서 억울하다’면서 화를 내곤 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금자의 아버지를 포함해 그리도 많은 국회의원이 줄줄이 잡혀갔던 것일까. 그날 금자가 들어가지 못한 법정 안으로 가보자.
<다음 회에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 서소문의 법원들은 1995년 서초동으로 이전했다.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추적한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과 유해발굴을 통해 한국전쟁의 상흔을 드러낸 ‘본헌터’를 썼다. 그밖의 지은책으로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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